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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Game _ 게임 이야기/최강의군단(Herowarz)

[최강의군단] 영원의 숲 - 오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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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이 살살 흔들리더니 그 사이에서 여자가 나왔다.

가시로 만든 머리끈에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여자의 형체였다.


“사람이었잖아!” 


오누는 감탄한다. 


“정말 예쁜 언니네?”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






[ 영원의 숲 ]


오누 (1)


오누는 초록색이다못해 진한 나뭇잎의 즙이 배어 나올 것만 같은 숲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곳이지만 집에서 혼쭐이 나고 가출한 여섯 살 아이에겐 무서울 게 없었다. 


숲의 경계선이라는 것도 딱 부러지게 알아보기가 어렵다. 

풀이 좀 더 많은 곳에서 놀다가 좀 더 풀이 왕성하게 자란 곳으로 조금씩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 숲 안이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숲의 공기가 이렇게 시원한데. 

못 들어가게 하는 건 어른들만 들어가고 싶어서일 거야.’ 


오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들은 다 못하게 하니까.’


아빠는 그녀를 싫어했다. 

그녀가 숫자를 가지고 노는 건 더 싫어했다. 

언니는 오누가 세 살 때 구구단을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긴 했었다. 

언니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오누는 차례로 나눗셈과 원주율과 근의 공식과 미지수를 이용한 계산법을 창안해 냈다. 

대부분이 그 세계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개념들이었는데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누 자신조차도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좋은 집안에 결혼해서 가는 게 최고야, 헛꿈 꾸지 마. 

그까짓 계산 좀 한다고 금은방 같은데 취직시켜 줄 거 같아? 

농부의 딸은 그런 데서 일할 수 없어.’ 


아빠는 햇빛에 바랜 듯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역시 뜨거운 태양에 말라버린 부스스한 머리를 흔들었다. 


‘니가 어려서 뭘 몰라.’ 


땅바닥에 자신의 딸이 써 놓은 알 수 없는 숫자들을 발로 비벼버리며 아이의 꿈도 같이 지워 없앴다. 

마을 사람들은 미친 듯이 땅바닥에 숫자를 써 내려가며 몰두해 있는 오누를 보며 쑥덕거렸다. 

아빠는 그런 소문이 커질까 봐 무서워했다.


‘쟁기 아범네 둘째 딸이 미쳤거나 마녀일지도 모른대요.’ 


이런 얘기가 마을에 돌기 시작하면 도시의 부유한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러면 혼삿길이 막히고 그가 받을 혼수는 물 건너 가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퍼뜩 들자 헤벌떡 달려들어 오누를 후려팼다. 

숫자를 그리기 위해 들고있던 작은 막대를 부러뜨리고 신발을 벗어 등짝을 여러 번 때렸다. 

오누는 엉엉 울며 집을 나왔다. 


조그맣지만 거대하게 분노한 아이는 무작정 달렸다. 

갈대밭에 들어와 두 팔로 갈대를 휘저어 때렸다. 

기분이 좀 풀렸다. 

목적지 없이, 휘두르기 좋은 갈대 묶음을 따라 달리다 보니 이 곳까지 와 버렸다.


영원의 숲. 신성한 장소. 신록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곳.


-숲으로 들어오는 길. 안쪽은 나무가 급격히 빽빽해서 어두워진다. 


‘신이 어디있겠어.’ 


오누는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가 하는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신이 있었다면 우린 진작 부자가 되었을 거야. 

엄마가 매일 저렇게 비는데. 

농사 한번 잘 된 적이 없잖아.’


오누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조심스럽게 숲에 발을 들여 놓았다.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잘게 쪼개져 들어왔다. 

보석처럼 나뭇잎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에 빛이 반사되어 조그만 무지개를 그렸다. 

벌레들이 찍찍거리고 새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나뭇잎이 사근사근 흔들렸다. 

오누는 기분이 좋아 사뿐사뿐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생각에 잠겨 뛰어다녔다.


“아. 그렇게 하면 풀리겠어.”


오누는 갑자기 떡갈나무 둥치 앞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려 했다. 

나뭇잎을 다 헤쳤지만 바닥에 이끼가 두툼하게 내려앉아 뭔가 깔끔하게 쓰이지 않았다. 

나무줄기로 땅을 긁어봐야 더 알아볼 수 없는 숫자가 되어 있었다.


“이걸 잊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신성한 숲의 공기가 그녀에게 영감을 준 걸지도 모른다. 

꼭 기억해야 해. 

두리번거리고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하면서도 그 수식을 잊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뾰족한 돌멩이를 들고 떡갈나무에 숫자와 기호를 새겼다.


- 얘야. 나무에 상처를 내면 안 돼.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며 들려왔다. 

숲이 우수수 떤다. 

깜짝 놀라 새기던 걸 멈췄다. 

아직 쓰지 못한 게 좀 더 있긴 했지만 이 정도 적었으면 다음에 보더라도  공식을 완성할 자신이 있었다.


“누구세요?”
-넌 누구니?

“전 오누에요. 옆 마을 쟁기 아범 둘째 딸이에요.”
- 다우 할멈이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던?


“그런 할멈은 없어요. 아빠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 죽었나 보구나. 생각해 보니 인간을 본 지가 50년이 넘었네. 


“당신은 이 숲의 신인가요?”
- 신은 아니고. 숲에서 살긴 해. 그 숫자들은 뭐니?


“이건. 그러니까 동그랗지만 원은 아닌 기다란 도형의 넓이를 구할 때 쓰려는 거에요”
- 그건 구해서 뭐하게?


“글쎄요. 건넛마을 방앗간 집 비뚤비뚤한 밭의 크기를 잴 때도 쓸 수 있고. 

부채가 찢어졌어도 크기를 알 수 있어요”
-그런 걸 좋아하니? 네 나이 또래의 아이는 좀 더 다른 걸 갖고 놀던데.


“언니가 그러는데 전 숫자의 천재래요.”
- 그래 보이는구나. 얼굴에 상처는 뭐니?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덤불이 살살 흔들리더니 그 사이에서 여자가 나왔다.


가시로 만든 머리끈에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여자의 형체였다.


“사람이었잖아!” 


오누는 감탄한다. 


“정말 예쁜 언니네?”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 


이제 목소리가 숲 전체에서 울리는 것 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날 봤다고는 하지 말아라. 약속이야. 대신 이걸 주마.” 


여자는 아이에게 잎으로 만든 주머니를 쥐여 줬다.


“이게 뭐예요?”
“씨앗이야. 그걸 밭에 심으면 잘 자라 줄 거야” 


여자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숲의 경계까지 이끌었다. 

오누는 그걸 받아 주머니에 넣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까 발견한 공식을 발전시키느라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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