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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Game/Herowarz

[최강의군단] 영원의 숲 - 최후의 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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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힘들지? 

신도 가끔 실수를 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종을 만드는 것 처럼."


여자는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며 짐승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짐승은 소리없이 몸에 힘을 풀고 땅바닥에 흘러내린다.


그렇게 어느 늦여름 밤, 

신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최후의 아르고는 숲의 일부가 되어갔다.






[ 영원의 숲 ]


프롤로그(Prologue) - 최후의 아르고


아르고는 배가 고팠다. 

마지막으로 유칼리를 씹은 후 해가 세 번 뜨고 달이 세 번 졌다. 

축 늘어진 배는 홀쭉했고 가죽은 윤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잔디와 풀잎을 삼켜 꾸역꾸역 위에 넣어 봤지만 에너지가 되기는커녕 복통만 늘었다. 


들판에 널려 있는 게 저런 건데. 억울하다. 

눈에는 찐득한 물기가 시야를 가리고 침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위대한 그의 동지들은 하나 둘 들판에 쓰러져 대지의 양분이 되어 갔다. 

숭고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무뿌리 사이에서, 

어두운 숲 속 썩은 나뭇잎을 덮고 잠이 든 채로 홀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아르고였다. 

두툼한 두 다리는 모두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오랫동안 달려 찾은 이 숲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저렇게 나무가 많으니 그의 유칼리도 달려있지 않을까? 

최소한 몇 그루쯤은. 

가능하면 그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았으면.


크고 둔한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고의 수는 그렇게 많은데 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건 그토록 적은 건지. 

그리고 그것마저도 왜 다시 생기지 않는지. 

 나무는 왜 다시 잎을 만들어 내지 않는지. 

누군가 그들을 만들었다면 어째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이처럼 짧은 생을 살다 마감하게 하는 건지. 


이 세상에서 그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온순하지만 커다란, 

하루에도 나뭇잎을 반 이상 털어낼 수 있는 동물은 없었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물가에서 물을 마실 때조차 작은 들쥐에게 먼저 양보하는 착한 아르고들.


마침내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영원의 숲으로 들어갔다. 

붕붕거리는 작은 새들이 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벌레가 앵앵거린다. 


표범처럼 생긴 육식동물이 나무 위를 타고 그를 쫓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 나무를 찾지 못한다면 표범의 배를 불리거나 흙이 되는 거나 같은 일이다. 


초원에서 내내 그를 쫓던 독수리들은 빽빽한 나무 때문에 시야를 잃고 푸르륵 흩어졌다. 

이제 그를 표적으로 삼는 것은 독수리에서 표범이 된 것뿐이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물을 마시고 숲 사이를 뚫고 들어온 따뜻한 빛에 털을 쪼이며 먹이를 찾아 움직였다. 

덩굴 나무, 야생 딸기, 전나무, 잣나무. 그가 먹을 수 없는 것들. 

그의 소화기관이 흡수할 수 없는 것들. 

숲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갔을 때 원하던 것을 찾았다. 

잎이 날카롭지 않고 둥글며 한 줄기에 여러 개가 방사형으로 달려있는 것. 

희망이 샘솟았다. 

입가에 침이 흐른다. 

희뿌연 눈이 뻐끔뻐끔거리며 열렸다가 닫혔다. 


나무 앞에 서서 앞발을 들고 일어났다. 

이파리를 하나 쥐고 커다란 입을 열어 씹어본다. 

맛이 달랐다.

영원의 숲에 한 동물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입 주위에 초록색 나뭇잎의 즙이 뭍은 채. 

누구에게라 할 것 없는 한탄과 죽음을 앞둔 생물의 슬픔이 퍼져 나갔다. 


일순간 온 숲의 생명이 숨을 죽여 아르고가 이 땅에서 곧 사라짐을 경외했다. 

짐승은 오랜 외침이 끝나자 풀썩 엎드려 자신의 앞발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표범이 나무에서 뛰어 내려왔다. 

빙글 돌아 그의 머리 쪽에 서서 몸을 도사리고 눈을 마주 보려 했다. 


싸우자. 

난 널 먹고 싶다. 

일어나라. 


그렇게 말한다. 

꼼짝도 하지 않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는 머리를 들어 그의 앞에 선 육식동물을 바라봤다. 

눈에는 어떤 공포도 증오도 원한도 없다. 

그렇게 잠시 얼룩무늬의 날렵한 동물을 보던 공허한 눈이 아래로 떨어지고 다시 엎드려 잠을 청했다. 


표범은 잠시 그 앞에서 싸움을 유도하지만 그러지 못하자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아르고의 마지막 개체는 허기 탓에 환영을 보고 있었다. 

오래전 그들의 친구와 부모들과 아이들이 어울려 몰려 다니던 그때. 

그리 먼 시간도 아니었다. 


겨울이 열 번, 열 다섯 번. 

마지막 겨울이 특히 추웠는데 그 이후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전의 계절들. 

그가 태어나서 열 번의 여름들. 

누워서 올려다보면 숲을 가득 채우던 유칼리들. 


짐승의 눈에 하얀 막 위로 물기가 번졌다. 

숲의 빛이 옅어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채웠다. 

땅이 차가워져 짐승의 몸이 굳는다. 

짐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만졌다. 


한때는 윤기가 흘러 반지르르했던 갈색 털은 군데군데 빠지고 헤져있다. 

손길이 닿자 일순 기분이 좋아졌다. 

삶의 에너지가 충만했던 때처럼. 

형제들과 진흙을 뒹굴며 놀았던 그 당시처럼. 


고개를 조금 들어봤다. 

인간 여자. 

머리가 길고 몸이 부드러운. 

다른 것 들처럼 싫은 냄새가 나는 이상한 색깔들의 거죽이 아닌 나뭇잎과 덩굴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여자가 입을 열어 짐승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냈다. 


"아르고... 아직 살아있는 게 있었네."

짐승은 끄덕였다. 

아우우우우-. 

입을 벌려 포효했다.


"그래. 먹을 게 없는 걸 잘 알아."


짐승은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나도 그걸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단다."


짐승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눈이 번쩍였다.


"이해하기 힘들지? 

신도 가끔 실수를 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종을 만드는 것 처럼."


여자는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며 짐승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짐승은 소리없이 몸에 힘을 풀고 땅바닥에 흘러내린다.


그렇게 어느 늦여름 밤, 

신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최후의 아르고는 숲의 일부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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