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가 죽고 나서 그는 잠적했다.
회사에서 그를 찾기 위해 능력자들을 풀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기술은 희귀했다.
그런데 희귀한 거보다 너무 위험한 능력이라는 게 문제였다.
[ 까마귀의 고해 ]
1부 1장 고해 (3)
‘까마귀의 둥지’ 라는 간판이 붙은 서점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그는 딱히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서점 구석에 있는 운영팀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한다.
직원들은 그가 나오는 걸 싫어한다.
사실 그의 모든 걸 좋아하지 않는다.
번화가에 있는 제법 큰 서점의 사장이 지저분한 경차를 모는 것을 경멸했고, 그가 가끔 성서를 인용하는 것도 질색했다.
한 달 전부터 일하기 시작한 당돌한 알바생이 특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를 보고 겁쟁이 사장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해 서점에서 그에게 시비를 거는 청년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남자가 무슨 용기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나요?’
사실 그도 그녀가 껌을 짝짝 소리 내며 씹어대는 거나 함부로 말하는 걸 싫어한다.
그러니까 피장파장이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하지는 못한다.
“화를 내면 안 돼. 그림자가 길어져.”
그렇게 말하던 S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립다.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아 볼 것을.
오늘은 케이, 그 알바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한번 질끈 씹을 때마다 껌에서 풍겨오는 달큰한 과일 향, 어울리지 않게 코를 찌르는 여고생의 향수를 맡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세 가지나 할 수 있다.
화를 참는 것, 냄새를 잘 맡는 것, 그리고 그림자를 조작하는 것.
그중 가장 많이 하는 건 첫 번째이고 가장 잘하는 일은 냄새를 맡는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냄새를 갖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전염병이 돈 이후 손님 수가 많이 줄어든 데다 단골손님만 나드는 낮 시간에는 문에서 딸랑하는 소리가 나면 고개를 들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점심시간에 잡지만 들춰보고 가는 저 여학생은 맞은편 건물의 햄버거집에서 일하는 게 틀림없다.
튀긴 감자의 냄새가 옷깃에 배어 있다.
경제 코너에서만 서성대는, 멋지게 머리를 다듬은 20대 남자에게는 항상 여자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매번 다른 여자의.
연애소설 코너에서 시간을 보내는 정장 차림의 아가씨에게서는 꽃 냄새가 났는데, 정확하게는 재스민이다.
꽃의 향기를 구별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생각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그녀를 '메아리의 피오나'라 불렀고 그녀는 에이스 등급의 염동 능력자였다.
가끔 손이 닿지 않는 5단 책꽂이에서 남들이 안보는 때를 틈타 염력으로 책을 몰래 뽑는 것을 보고 웃기도 했었다.
조금만. 왼쪽으로. 그거 말고.
됐다. 받았어.
유혹의. 기술? 재밌겠어. 제법.
누가. 보는 건? 들키면. 큰일인데.
그녀는 정신 감응 능력자이기도 한데 염동력자로는 최고 수준이었지만 정신감응은 문제가 많았다.
그녀로부터 특정한 대상에게 흐르는 생각은 일방통행이었고, 그것마저도 조절을 하지 못한다.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생각이 흘러간다.
그는 그녀의 신호를 잡아내는 몇 안 되는 수신자 중 하나였다.
그가 회사에 등록되어 있던 시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당시에도 유명한 능력자였고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으로 넘어오곤 했었다.
그의 코드명은 갈가마귀였다.
그는 특별 능력자로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하루의 상당 부분을 감시 속에서 살았다.
회사 사무실에 틀어박혀 별 개성 없는 사무 일들을 맡아서 해야 했다.
심심해서 보안망 안을 불법적으로 들여다보다 의외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하는 게 참으로 더러운 일들이 많다는 것.
그걸 보고 있으면 매우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S가 죽고 나서 그는 잠적했다.
회사에서 그를 찾기 위해 능력자들을 풀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기술은 희귀했다.
그런데 희귀한 거보다 너무 위험한 능력이라는 게 문제였다.
S의 특기는 그림자를 창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공격하는 거였다.
그것 하나만으로 에이스까지 올랐지만, 능력을 쓰면 쓸수록, 분노하고 공격하고 죽이고 괴롭힐수록 자신의 그림자에 먹혀들어갔다.
그녀는 그 일을 하는 걸 그만두고 싶어 했지만 회사가 그냥 두지 않았다.
참으면 되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야.
세상이 험해.
니 능력이 필요해. -
S는 버티고 버텼다.
수녀처럼 살았고 누군가의 품을 무척 그리워하면서도 그의 손조차 만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림자가 그녀를 차지했다.
어번-3 광장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저녁 햇살에 길게 늘어난 그림자를 따라 몸이 쭉 늘어나 얇아지더니 그대로 퍼져 죽어버렸다.
그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준 존재였는데, 까마귀 하나가 사라졌다.
다른 까마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S가 죽기 전에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분노를 잠재워.
조금이라도 마귀가 커지려고 한다면 그림자에 집중하면 도움이 돼.
너의 손 그림자를 바라봐.
늘였다 줄였다 반복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야.’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녀가 말해 준 방법 외에도 많은 걸 시도해 보았다.
상대방의 그림자를 건드려 보기도 하고
-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리면 재미있기도 했다 -
성당에서 죄를 고해하기도 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기도 했다.
사람들은 의지할 게 없어지면 종교에 귀의하지 않던가.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형편이었다.
더더구나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할 수는 없었다.
그건 불길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눈먼 까마귀와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다시 나타난 그는 서점 주인 행세를 했다.
그것도 우뚝 솟은 회사 건물의 맞은편 건물 1층에.
문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골방에 박혀 일하던 사무직 직원이라 얼굴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회사에 등록되어 있던 사진은 그가 회사를 나오면서 다른 얼굴로 조작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 숨어서 조금씩 회사의 일을 방해했다.
여전히 회사의 보안망을 들락날락하면서.
능력자들을 동원해 자행하는 온갖 불법적인 개입과 린치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배포하는 게 그의 실제 직업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림자의 능력을 공격적으로만 사용하지 않으면 들킬 일은 없었다.
게다가 그림자를 날카롭게 갈기 시작하면 S처럼 될 게 뻔하다.
그는 S의 운명을 되뇌고 명심하고 고해했다.
▶ [세계관] 까마귀의 고해 1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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