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름은 뭐로 하겠소?”
“…갈가마귀.”
그는 잠시 생각하고 그의 코드명을 말한다.
“날짐승이군. 빠르긴 하쇼?
이왕이면 좀 더 강해 보이는 걸로 하지그래.
독수리라던가.”
“됐어. 원래대로가 좋아.”
[ 까마귀의 고해 ]
2부 5장 투기장
촌장은 그를 데리고 해변의 마을에서 출발해 3㎞ 정도를 걸어 또 다른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그냥 걸었으면 반만 걸어도 올 거리였는데 빙 돌아온 게 신경질이 난다.
“왜 해변을 따라 쭉 오지 않은 거요? 싸울 힘도 없어 죽겠네.”
“여긴 바다에서 뭐가 나와. 사흘 동안 헤맸다면 이상한 것들 많이 봤을 텐데?”
“검은 사람들을 봤소.”
“히치-키치야. 움직일 때 그런 소리가 나지. 안 볼 때만 움직여. 멀리서 봐서 다행이구만. 잡히면 그들처럼 된다네.”
“거대한 네 발 짐승도.”
“그건 ‘야운’ 이라 부르지. 울음소리가 특이해서.”
“이름을 다 편하게도 짓는군. 커다란 거미는 뭐라 하는데?”
“거미는 거미지.”
촌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뭘 기대했나.”
“움직일 때 뜨르르르르 소리가 나던데.”
그는 들은 걸 그대로 흉내 낸다.
“어이쿠. 성대모사는 영 재능이 없군. 여기서 싸울 준비나 하고 있게. 난 배급을 받으러.”
촌장은 혀를 쯧쯧 차며 언덕을 올라간다.
언덕 위에는 검은 성이 반쯤 완성되어 가고 있다.
제법 웅장해서 중세 시대의 성을 보는 것 같다.
다 쌓으면 30층 높이는 되겠어.
그는 어림짐작해 본다.
이곳의 돌을 가지고 축성을 하니 색이 검을 수밖에 없다.
인부들이 피라미드를 짓는 것처럼 수작업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다.
촌장이 어제 말한 노동이라는 게 이걸 말하는 듯했다.
성주라는 인간이 - 아니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 그림자에 먹혀 이 세계에 넘어온 사람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음식을 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빵을 어떻게 만드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꾼들을 향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격식 있는 말투로 지시한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니 원두막 같은 곳에 조그만 여자애가 앉아서 작은 팔을 흔들고 있다.
생김새와 목소리가 연결되지 않는다.
아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형태가 인형을 생각나게 한다.
목소리는 어른이고?
호기심에 촌장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촌장은 바로 그 여자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얼굴이 인간이 아니다.
쭉 째진 눈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피부가 일정한 베이지색으로 티 끝 하나 없고 머리와 얼굴선이 너무 기하학적으로 깔끔하다.
“인형이 말을 하는군.”
그는 끼어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해서 말이 나와버린다.
“이 작자는 누구냐?”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투기장에 나갈 신입입니다.”
인형은 그를 한번 쓱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한다.
“지나치게 평이하구나. 다음엔 좀 쓸만한 전사를 찾아오거라.”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하려는데 촌장이 제지하며 말한다.
“그보다 왜 지난주보다 음식이 적습니까요? 이렇게 신입이 더 늘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배 하나를 통째로 해왕류가 먹어버렸느니라. 새로 건조하는 데 몇 달이 걸린다네.”
“먹을게 너무 적습니다. 게다가 경찰 패거리들이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데 아스카님은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정말이냐?”
“물론입다마다요. 게다가 젊은 여자를 발견하면 잡아다 괴물에게 먹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건 소문일 뿐이지.”
“아무튼, 약탈당하고 있는 건 사실입지요.”
“내 그쪽 놈들하고 얘기해 봄세.”
“꼭 좀 부탁드립니다.”
촌장은 작은 인형에게 꾸벅꾸벅 몇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그의 팔을 붙잡고 언덕 너머로 끌고 갔다.
“인형이 말을 해.”
그는 아직도 신기해한다.
“이 이상 뭐가 더 놀랄 게 있다고. 아스카라고, 성주의 대행인이요. 아까처럼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면 우리 음식이 줄어. 다음부터는 가까이 가지도 마쇼.”
“살아 움직이다니. 하나 갖고 싶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말했다가는 목이 잘릴 거요.”
촌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나저나 이상한 취미가 있군. 인형을 좋아하시오?”
“인형극을 좋아하지.”
“그게 그거지. 별난 취향이네.”
언덕을 내려가는데 축성 터의 뒤쪽에서 사람들이 흥분해서 외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높이 솟은 축대를 돌아들어 가니 수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위쪽으로 나무로 만든 계단이 있어서 몇몇 높은 사람들이 거기 앉아 투기장을 편하게 내려다보는 모양이다.
대개는 철망을 겹겹이 둘러싸고 서서 보고 있다.
중앙 위쪽에 횃불이 타고 있어서 투기장 내부는 아주 밝다.
그림자도 뚜렷하다.
생각보다 좋은 상황이다.
실내에서 싸우거나 이렇게 흐린 날에 아무 조명이 없으면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잡아채기가 쉽지 않은데 이 정도면 눈을 감고도 잡겠다 싶다.
“잠깐 기다리쇼. 등록을 먼저 해야 하니.”
촌장이 묻는다.
“근데 이름은 뭐로 하겠소?”
“…갈가마귀.”
그는 잠시 생각하고 그의 코드명을 말한다.
“날짐승이군. 빠르긴 하쇼? 이왕이면 좀 더 강해 보이는 걸로 하지그래. 독수리라던가.”
“됐어. 원래대로가 좋아.”
촌장은 툴툴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 투기장 안을 구경한다.
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하다.
거친 돌바닥이 뻘겋게 물들어 있고 피가 묻어 있지 않은 곳도 대부분 검붉은 얼룩으로 덮여 있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던 건가.
“규칙이나 심판 같은 건 없는 거요?”
그는 옆에서 흥분하고 있는 남자를 붙들고 큰 소리로 묻는다.
“죽기 직전에 멈추기는 하지.”
남자는 고개도 안 돌리고 말한다.
“너무 늦는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남자가 말하며 웃는다.
그는 전혀 웃기지 않다.
피를 보니 또 심장이 울렁거리고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죽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그러다 악귀가 될 수도 있겠지.
그들의 시선을 따라 싸우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손에 무기는 들고 있지 않다.
‘맨손으로 때려죽이기는 어렵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철창 안에서 몸이 제법 큼지막한 사내 둘이 지루한 싸움을 펼치고 있다.
이미 한참을 싸웠는지 다리가 멈춰 있다.
팔만 휘두르고 있는데 그것조차 맞아도 쓰러질 거 같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더니 서로 몸이 엉켜 남자 둘이 포옹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관중들은 야유한다.
계단 위쪽에 아까의 그 여자애 인형이 올라서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 말을 걸더니 뿌우웅 하는 경적이 울린다.
투기장 안의 남자들은 헉헉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직도 이 모양이구나.”
인형이 낭랑하게 외친다.
“둘 다 탈락이다.”
두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투기장을 나간다.
관중들은 일부는 환호하며 웃고 일부는 야유를 퍼붓는다.
“다음은 탱크와 갈가마귀의 전투다.”
깃발을 들고 있는 사내가 소리친다.
세컨을 본다더니 어디로 사라진거지- 하며 그는 투기장 안으로 들어간다.
관중인 줄 알고 사람들이 잘 비켜주지 않아 이리저리 밀어젖히고서야 발을 들이밀 수 있다.
“넌 여기 왜 들어와?”
깃발을 든 남자가 말한다.
“내가 갈가마귀요.”
그는 대답한다.
관중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철컹하는 소리에 웃음이 함성으로 바뀐다.
반대편에서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들어온다.
탱크! 탱크! 하는 합창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이 누굴 응원할지 이미 결정을 본 모양이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싸움을 준비한다.
▶ [세계관] 까마귀의 고해 2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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