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입을 조그맣게 오므려 소리를 낸다.
아마도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저것뿐인 듯하다.
“말을 못하나 봐. 오빠. 우리가 이름을 지어주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한다.
“엘이 좋겠어. 내가 케이니까.”
[ 까마귀의 고해 ]
2부 9장 엘
“제발 도와주게. 그래도 이 마을에서 비도 피하고 음식도 먹지 않았는가.”
저녁 무렵,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오는 내내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촌장이 사색이 되어 말한다.
‘비는 감옥에서 피했고 먹을 건 내가 벌었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경찰 패거리라는 게 뭐 하는 것들인데 그렇게 벌벌 떠는 거요?”
“약탈자들이야. 투기장에서 다섯인가 여섯인가를 죽인 두웡 이라는 동양놈이 있는데, 너무 잔인해서 아스카가 투기장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네.”
“그놈 하나면 다들 모여서 막으면 될 거 아니오.”
“그게 다가 아냐. 경찰이 대장인데 악독하기 이를 데가 없어. 쇠막대기로 사람을 죽을 때까지 패는 걸 본 적 있어. 부하들도 많아. 머리에 종이봉투 같은 걸 쓴 놈들인데 암튼 제정신들이 아냐. 괴물을 부린다는 소문도 있어. 꼬챙이라고, 젊은 여자를 찾아서 몸에 꼬리를 꽂아 넣어 번식시킨다더군.”
그가 아무 말없이 생각하고 있자 흥정을 건다.
“자네라도 무섭겠지. 하지만 우릴 보호해 준다면 여자를 주겠네. 아주 예뻐.”
“여자?”
그는 깜짝 놀란다.
‘케이가 들킨 건가.’
“이리 와 보게”
촌장은 감옥의 가장 안쪽 방으로 그를 데려간다.
틈이 안 맞아 있는 돌을 몇 개 치우고 몸을 낮춰 좁은 방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들이미는데 통풍이 안 된 퀴퀴한 공기와 함께 케이가 아닌 다른 여자의 냄새가 풍겨온다.
감옥 안에는 긴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이 사슬에 꽁꽁 매여 누워있었다.
얼굴은 산발이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옷이 낡고 찢어져 드러난 어깨와 엉덩이의 선으로 여자라는 걸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촌장을 노려본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감옥에 넣어둔 거요? 사슬은 또 뭐고.”
“아니 뭐. 말이 안 통하니까.”
촌장은 시선을 외면하며 더듬더듬 말한다.
여자 다리가 있는 그대로 다 보인다.
심지어 엉덩이 아래쪽까지 노출되어 있다.
상의도 옷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찢어져 있고 꿈틀댈 때마다 가슴이 보일 정도다.
‘이것들이 옷을 찢었군. 여자 하나를 놓고…’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는 촌장의 멱살을 쥔다.
분노가 섞여 목소리가 잦아든다.
“아냐아냐. 아무것도 못 했어. 앙탈이 심해서.”
“이게 사람이 할 일인가. 약한 여자를 공격하고 가둬두고 묶어놓다니.”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촌장의 옷깃이 조여든다.
“이봐. 아이고. 여긴 여자가 거의 없어. 게다가 이렇게 예쁜 걸 찾았는데 횡재했다 싶었지. 사슬은 처음부터 묶여있었다고.”
“정말인가?”
“풀려고 했더니 난리도 아니었어. 마을 사내들이 사슬에 맞아서 다쳤단 말일세.”
“이것들 다 한통속이구만.”
여자를 안아 들며 말한다.
“비켜.”
그는 좁은 입구를 나와 자신의 방에 여자를 내려놓는다.
“그 여자 가질 거면 요구는 들어주는 거지?”
촌장이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말한다.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위협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촌장은 이내 감옥을 나간다.
방안에 앉아 쇠같이 단단한 육포를 씹으며 케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무슨 고기일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단백질을 섭취해 둘 필요가 있다.
부족한 음식과 이틀간의 싸움으로 몸이 날로 약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권투선수에게 얻어맞은 갈비뼈가 욱신거렸고 눈의 멍은 흐려지기는커녕 더 짙어지고 있다.
낮에 그림자를 무리하게 쓴 여파인지 방금 전처럼 화가 조금만 나도 머리카락이 불끈거린다.
안정이 필요하다.
그는 혼자서 성경을 읊조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아.”
창세기를 듣더니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와, 말했어.”
이어서 케이의 목소리도 들린다.
“언제부터 있었냐.”
“처음부터.”
“이제 향수가 다 사라졌구나.”
그는 케이의 머리카락에 대고 코를 킁킁거려본다.
“응? 향수는 안 가지고 다니는데.”
“왜 진작 안 나왔어?”
“오빠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이 여자도 덮치나 안 덮치나.”
“무슨 소리냐. 난 수도승처럼 살았는데. 태어나고 여자라고는 손도 안 댔다고.”
“흥. 어련하시겠어요. 그나저나.”
케이는 사슬을 풀려고 매듭을 만진다
“불편하겠어.”
사슬이 딸깍하고 움직이자 여자가 움찔하더니 기이한 울음소리를 낸다.
“아우우우우-”
그는 어쩔 수 없이 양손을 들어 귀를 막는다.
큰 소리도 아닌데 귓속을 때리는 것 같이 울리는 울음이다.
우우 하는 발음이 이어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진다.
멀리서 야우우우우운 하는 짐승의 울음이 돌아온다.
끼익거리는 괴성과 크르릉 하는 야수의 외침이 합쳐져 짐승들이 난동을 부리는 동물원의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만.”
그는 간청한다.
자신이 몸에서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귀를 막고 그만해-하고 말하는 또 하나의 갈가마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감각.
케이는 사슬에서 손을 뗀다.
그제야 울음소리가 멈춘다.
“이 여자 이상해.”
케이가 말한다.
“사슬을.”
그는 숨이 차서 말한다.
“놔두는 게 좋겠다.”
“이름이 뭐예요?”
그녀는 겁도 없이 여자를 보며 묻는다.
“아.”
여자는 입을 조그맣게 오므려 소리를 낸다.
아마도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저것뿐인 듯하다.
“말을 못하나 봐. 오빠. 우리가 이름을 지어주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한다.
“엘이 좋겠어. 내가 케이니까.”
그러더니 연신 기침을 한다.
“넌 왜 케이냐?”
“카모플라쥬의 대표격인 에이스 능력자니까요.”
대표는 뭐고 에이스는 뭔지.
그는 웃으며 설명해 준다.
“네가 직접 지은 거지? 카모플라쥬는 C야.”
“정말요?”
“어학 시간에 놀아서 그래.”
“그건 인정. 같은 발음이 철자가 다른 게 말이 돼? 이상한 언어라니까 정말.”
“다른 언어라도 아는 거 있냐?”
“무슨 소리! 영어도 벅찬데. 열심히 공부하고 풀었는데 20점 맞은 적도 있다구. 그래서 같은 숫자로 쭉 적었더니 35점 맞았어. 그래서 아, 언어는 나한테는 안 맞나 했지.”
말을 할수록 케이의 목소리가 갈라져 간다.
그는 말없이 먹을 걸 건넨다.
“물을 줄게요. 입을 벌려봐요.”
케이는 가죽 주머니를 꺼내 사슬에 묶인 여자의 입가에 흘려보낸다.
여자는 허겁지겁 받아먹는다.
입가를 계속 핥는 게 언제 뭘 먹었는지 궁금할 정도다.
“오빠 이 언니, 내가 돌봐야겠어.”
그녀는 드디어 할 일을 찾은 것처럼 신이 나 한다.
옆방에서 지저분한 거적때기를 가져와 옷도 여미어 주고 머리도 만져 주고 맨살이 드러난 곳을 덮어주고 빵을 잘게 잘라서 먹여주기도 한다.
그는 가만히 여자를 관찰한다.
머리가 정리되자 얼굴이 드러난다.
입술이 도톰한 게 더럽지만 않으면 꽤 미인이었을 거 같다.
볼에 젖살이 살짝 있는 게 기껏해야 스물 정도나 될까 싶었다가도 눈빛이 무겁고 가라앉아 있어서 실제로는 좀 더 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만 좀 쳐다봐, 오빠.”
케이가 실눈을 뜨고 말한다.
“에이, 승질나. 저리 나가 있어. 훠이-”
손을 휘적휘적 저어 쫓아 보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감옥을 나와 문간에 앉아 검은 구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 [세계관] 까마귀의 고해 2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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