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괜찮아요?
저도 같이 가요. 도움이 될 텐데."
"필요 없어."
그 말을 뒤로하고 나왔다.
마리는 힘이 부쳤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 인간의 증명 ]
9장
맥은 쏘지 못했다.
팔을 떨어뜨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당신이었네요."
여자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건다.
옆구리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붕대."
"네?"
"붕대 있나?"
"네. 욕실 앞에 꺼내 놨는데."
몸을 일으키려 해서 제지하고 붕대를 찾아 돌아왔다.
여자의 허리에 단단히 감았다.
가슴이 팔을 스쳤다.
옷장에서 옷을 대충 집어서 던져줬다.
"옷도 좀 입어."
"조직에서 나왔군요. 집에 들이닥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반바지에 다리를 힘겹게 꿰어 넣으면서 물었다.
"왜 안 쏴요?"
"이제 그만 하려고."
"좀 더 빨리 그만두시지. 배가 아파요."
"시끄러. 난 온몸이 욱신거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니까 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시위하는 걸로는 부족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아빠의 복수에요."
"그 정도 마음가짐으로 안돼.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
기회가 될 때 마다 명줄을 끊어 놔야지.
아까 날 죽일 기회도 있었잖아.
그래서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런 거 같네요."
그리고 또 그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안 죽었잖아요."
이 미소를 계속 볼 수 있다면.
그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병원은 바로 앞이긴 한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났지만 금세 비틀거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래. 업혀."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채워 호주머니에 꽂았다.
몸을 돌려 앉으니까 그녀가 풀썩 등에 기대 왔다.
붕대로 고정한 옆구리가 비틀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밤거리는 싸늘했다.
술에 취한 여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회사원들, 실랑이를 벌이는 연인들.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바람에 얼굴은 차가웠지만 등은 따뜻했다.
양손에 만져지는 다리의 맨살이 부드러웠다.
움직임이 없어서 기절했나 싶었는데 조그만 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일하는 거죠?"
"그랬었지. 아까 그만뒀지만."
"당신들이 아빠를 살해했어요.
작은 쌀집인데 그것까지도 욕심이 났던가 봐요.
대가 세셔서 절대 굽히지 않았죠."
그는 듣고 있었다.
"하루는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서는 가게를 다 때려 부수고 아빨 끌고 갔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구요."
"본보기 같은 거야.
안 그러면 통제가 안 되니까."
"흥. 본보기 같은 소리 하시네요.
아저씨도 아빠 같은 사람 많이 죽였죠?"
"난 전투 담당이야.
다른 조직에서 시비를 걸거나, 혹은 헤라클레스 -
너 같은 경우 말야. 맞지?"
"네. 그때부터 이 거리에서 혼자 살았거든요.
여기 애들은 무척 거칠어요.
저처럼 가족을 잃은 애들도 많고.
하루가 멀다 하고 훔치고 싸우고 난리였죠. 앗…"
여자가 꿈틀거렸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프냐?"
"아뇨 다리가 간지러워서요. 아저씨 손요. 하하."
"아."
손을 허벅지에 꼭 붙여 간질거리지 않게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싸움은 꽤 잘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쌀가마니를 잘 날랐거든요.
일대일 싸움에서는 져 본 적이 없어요.
아저씨랑도 다시 싸우면 안 질걸요?"
"잘났다."
여자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랬는데 한 번은 총을 꺼내는 녀석이 있었어요.
삼촌 총을 들고 왔다던가.
총알이 머리를 스치는데 여러 가지 생각도 같이 스쳐 가더라구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죠.
혼자서 조직을 다 없앨 수는 없으니까.
경찰청장이나 시장이 되려 했죠."
"그래서 학생회장까지 잘하고 있던데,
그렇게 쭉 할 것이지 웬 헤라클레스 놀이야."
"분명 헤라 라고 적었는데?
복수의 여신요.
왜 헤라클레스가 된 건지 모르겠네요."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미소를 짓고 있겠구나.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정공법으로 조직을 없애는 거,
그건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도 하고.
그냥 제 마음의 불꽃 같은 거라고 하죠.
근데 집은 어떻게 찾은 거에요?"
"핏자국. 지혈을 했어야지."
"워커는 중간에 흙에 털었는데.
관찰력이 대단하시네요."
얘기하다가 조직에 보고한 게 생각났다.
핏자국을 지워야겠어.
그녀를 응급실에 눕히고 치료하는 걸 지켜봤다.
의사는 피를 많이 흘려서 그렇지 상처가 깊지는 않다고 했다.
"마리."
"어, 이름을 아네?"
"영웅놀이 같은 거 그만둬.
핏자국을 지우고 내가 사라지면 너랑 연관시키기는 어려울 거고.
더 일을 벌이지만 않으면 안전해."
"아저씨는 괜찮아요?
저도 같이 가요. 도움이 될 텐데."
"필요 없어."
그 말을 뒤로하고 나왔다.
마리는 힘이 부쳤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