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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면 늦어.
힙샷이야. 기억해 힙샷.
몸을 기울여 낮추고 엉덩이께에서 바로 쏘는 거야.
먼저 쏘기만 하면 맞은 상대는 몸이 비틀려서
너한테 날아오는 총알은 빗나가는 거야.
[ 인간의 증명 ]
10장
병원 앞에 대기하고 있는 빨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비가 툭툭 떨어진다.
그 새 싸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의 무게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느새 흠뻑 젖는다.
잘됐어.
길바닥의 핏방울은 놔둬도 되겠군.
그래도 시간이 부족했다.
아디다스 백에 리볼버와 탄창 박스, 금고 안의 현금다발을 쓸어 담았다.
사무실에서도 슬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문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있는 토라의 사진만 챙겼다.
가방을 보조석에 던져 넣고 지프를 몰아 마리의 원룸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킨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 와중에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한 손으로 운전하는 건 아주 익숙하다.
운전 중에 총도 쏴 본 적 있으니.
세 곡이 끝날 때쯤 주차장에 차를 넣었다.
그녀의 방에 가 보니 달라진 건 없었다.
분홍색 커튼, 레이스 침대. 피가 얼룩져 있는 하얀색 이불.
취향은 공주야.
수건에 물을 묻혀 현관 손잡이와 도어락의 핏물을 닦고 홑이불과 수건을 돌돌 말아 세탁기에 쑤셔 넣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일은 다 한겨?"
뒤에서 키즈가 나타났다.
가슴이 덜컥 했다.
뒤에 졸개 세 명을 달고 있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안에 있지."
"이 새끼가 거짓말은. 안에 없다던데."
졸개를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셋 다 총을 들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병원에 간 사이에 흔적을 따라 들어와 봤겠지.
아니면 감시하고 있었거나.
그와 키즈, 둘 다에게 임무를 맡겼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도 발을 뺄 수가 없겠구나.
"왜 그런겨? 손이 떨려서 못 쏜 거여?"
"일 그만두려고."
"잘됐군.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잖여?"
졸개들이 철컥 하며 공이를 세운다.
"알고 있어."
넷을 한꺼번에 쏘기는 어렵다.
술이 들어간 지 만 하루가 지나서 손도 심하게 떨렸다.
게다가 몸을 숨길 데도 없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어서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기다려 봐야 차가 들어올 기미도 없다.
"야. 원망은 마라. 니가 자초한 일이니.
나도 잠 줄이면서 니 뒤처리나 하고 앉았잖여."
키즈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래도 한때 괜찮은 총잡이라고 하던 녀석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가지고는…"
"첫 번째야."
"뭐라냐?"
"첫 번째 총잡이라고. 넌 나보다 항상 늦었잖아."
"허어 이 새끼가."
"라티노들과 싸울 때 말야. 내가 다 끝냈지.
넌 차 뒤에서 오줌 지리고 있었잖아?"
일부러 가장 싫어하는 얘길 꺼냈다.
졸개 하나가 피식 웃다가 키즈가 노려보자 황급히 표정을 굳힌다.
"이게 끝까지 사람 열받게 만드네."
키즈는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새끼, 총 하나 쥐어 줘 바라."
"어 형님…"
졸개들은 주저했다.
"잘 봐. 누가 위인지 똑바로 보고 떠들어 대.
야, 그냥 야 니꺼 꺼내 들어.
별 등신 같은 게 예전에 좀 날렸다고 날 무시해버려잉?
넌 저기 저-기 가서 서 봐."
총구를 이리저리 흔들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다섯 걸음 걷는 거다. 야. 니가 세라."
손은 벌벌 떨리고 다섯 세는 도중에 튈 수도 없었지만 그냥 죽는 것보다 나았다.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녀도 잡혀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묻히겠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비벼대면서 일어났다.
"하나."
그간 무수한 총격전을 겪어도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다.
아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이러다 죽으면 죽는 거고 했었지.
"둘."
이번엔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손을 쳐다보았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겠는데.
"셋."
총을 움켜잡았다.
어쨌든 쏘기는 해야지.
토라가 빨리 쏘는 자세에 대해 말했던 걸 떠올렸다.
평소처럼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면 늦어.
힙샷이야. 기억해 힙샷.
몸을 기울여 낮추고 엉덩이께에서 바로 쏘는 거야.
먼저 쏘기만 하면 맞은 상대는 몸이 비틀려서 너한테 날아오는 총알은 빗나가는 거야.
"넷."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었을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섯."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네 발을 쐈다.
머리 하나당 하나씩.
첫 두 발은 정확하게 들어갔다.
키즈와 한 녀석이 풀썩 쓰러졌다.
나머지 두 방은 빗나갔다.
역시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다리라도 맞췄을 텐데.
자동차 사이로 몸을 던지는데 총성이 되돌아왔다.
다리에 한 방 맞았다.
어쩐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했더니 키즈에게 겨드랑이 근처에 한 방 맞은 모양이다.
왼쪽 허리까지가 축축해졌다.
스친 것도 아니고 총알이 박혔군.
심장에서 몇 센티 거리였는데 그게 언제나 키즈와 그의 차이였다.
총알이 계속 날아와서 차를 때렸다.
몸을 더 숙였다.
그에게는 단 두 발의 총알이 남았다.
적은 두 명.
어떻게 되고 있는지라도 보려고 머리를 들었다가 눈앞이 깜깜해지며 고개가 땅에 쿵 떨어졌다.
'더 이상은 운이 따르지 않는군.'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 번만 너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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