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애의 날렵한 다리 때문인지, 미소 때문인지, 귀와 털보 때문인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삶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술도 끊고 저렇게 해맑은 여자애와 햇살 아래서 데이트도 하고
사람을 관찰하고 주변을 분석하는 습관도 버리고
아침 해를 보며 눈을 뜨고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꼭 안고 잠들고…
[ 인간의 증명 ]
3장
맥은 저녁노을이 깔린 도심으로 나섰다.
사무실은 세 블록 건너에 있는데 하필 시위를 그 사이에서 하고 있다.
돌아가면 세 블록이 또 늘어난다.
카메라에 노출되는 걸 피하기 위해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빠른 걸음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무리로 다가갔다.
안경 쓴 남학생이 가로막았다.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제약회사의 만행을 일반 시민의 입장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마당에…"
작고 노란 배지와 종이를 건네려 했다.
배지에는 대학 로고와 상식적인 어쩌고 하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맥은 무시하고 슥 비켜갔다.
뒤에서 잠깐만요 하며 뭐라고 말을 더 했지만 다행히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사람 죽이는 해결사의 서명이 세상을 위해 뭐가 필요하겠어.'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위는 주변에 피해를 주잖아.
나한테는 특히 더.
대학생들이면 공부를 해야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카메라가 급하게 움직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푹 내리깔고 피하려는데 사람들이 그를 지나쳐 갔다.
카메라들이 단상 앞에 우르르 배치되고 있었다.
여학생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마리! 마리! 학생들의 당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저 여자가 대장인가.
대학생들도 조직과 다를 게 없군.'
마리라는 여자애는 짙은 갈색 머리에 매끄러운 다리를 잘 드러내는 7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로 덮인 가선이 부드럽게 노출되어 있었다.
'귀엽군. 가장 예쁠 나이지.
스물정도 되었으려나.'
그녀가 시위대를 한번 돌아보고, 제약회사 빌딩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무척 환했다.
'밝은 여자네.'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여자가 입을 열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귀가 살짝 눌려있었다.
그와 한때 같이 일했던 털보와 비슷했다.
그 녀석의 귀는 뭉개져서 귓바퀴가 머리에 붙어있는 것 같이 너덜너덜했는데 그걸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다니곤 했다.
나이가 들자 털보는 귀를 잘라서 조직에 놓고 걸어나갔다.
시체가 되어 조직을 떠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라 했다.
이 여자애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설마. 어렸을 때 다쳤을 수도 있겠지.'
드러난 발목에도 상처가 있었다.
생긴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여자애의 날렵한 다리 때문인지, 미소 때문인지, 귀와 털보 때문인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가지지 못한, 가질 수 없는 삶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술도 끊고 저렇게 해맑은 여자애와 햇살 아래서 데이트도 하고 사람을 관찰하고 주변을 분석하는 습관도 버리고 아침 해를 보며 눈을 뜨고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꼭 안고 잠들고…
그러는데 여자가 말을 끝내고 내려왔다.
뒤이어 단상에 남자가 올라갔다.
"학생회장에 이어 부학생회장의 한 말씀 듣겠습니다."
마이크에서 끼잉 하는 소리와 함께 소개가 이어졌다.
'좀 전의 그녀가 학생회장이었군.'
연설을 시작하는 남자애는 조각 같은 얼굴을 한 멋쟁이였다.
목소리도 적당히 잘 울리고 옷은 단박에 부티가 흐르는 데다 호주머니 자락에 BMW 키링이 삐져나와 있었다.
맥은 자신의 알코올 냄새가 배인 후줄근한 회색 후디를 더 깊이 눌러 내렸다.
마리와 그 남자애는 서로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울리는 한 쌍이군.
그래, 저렇게 잠시 사회에 관심을 가졌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고 사는 거지.'
그는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