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몇 차례 더 공방이 벌어지는 중에
그녀가 남자애를 부축하고 일어나는 게 보였다.
체구에 비해 가뿐하게 들어 업고 문을 나서는 게 기특했다.
'눈치가 빠르네.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 인간의 증명 ]
5장
집에 돌아오는 거리는 밤이 내려앉았다.
입김이 하얬다.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보도 블럭을 세다가 보니 현관 앞에 도착했다.
손잡이는 익숙한 각도로 정확하게 비틀어져 있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술을 사오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그 후로 한 시간 동안 술을 사오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충혈된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며 집을 나섰다.
'바에 가서 마시는 거야.
오늘은 딱 세 잔 만.'
이브라힘의 방주 라는 술집 앞에 서서 또 몇 분간 생각하다 결국 문을 밀어 젖히고 들어갔다.
토요일 밤이라 좌석이 다 차서 카운터에 걸터앉아 스트레이트를 시켰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잔을 받자마자 텁 털어 넣었다.
"안주는 됐어."
말하면서 눈이 마주치자 바텐더가 눈을 돌렸다.
문을 닫을 때 그가 정신을 잃고 엎드려 있으면 골치겠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또 왔구나 싶겠지.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 헤라클레스인지 하는 놈이 나타나실지 모르니.
30분에 한 잔씩.
12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난다.
나름대로 규칙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술이 몸을 한 바퀴 돌자 멍멍한 귀가 갑자기 확 뚫릴 때처럼 감각이 다 작동하기 시작했다.
늘 하듯이 주변을 살폈다.
카운터 위에는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안 보고 집어도 다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상대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가 항상 앉는 안쪽 테이블에는 두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형사다.
말투도 그렇지만 사복형사의 전형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권총 때문에 불룩해진 왼쪽 가슴의 옷섶을 보지 않아도 허리춤에 찬 경찰봉이 노골적이었다.
'형사가 아니라 경찰 나리였군.'
사복 차림에 경찰봉을 차고 다니는 경찰은 처음 봤다.
비싼 바가 아니라서 이곳에도 종종 형사들이 오긴 한다.
어쨌든 그들도 술은 필요할 테니까.
같은 공간에서 마시는 건 이래저래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신경 안 쓰면 그쪽도 신경 쓸 일은 없다.
그는 술을 마셔도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마셔서 문제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시선에 콧수염이 잡혔다.
서로 눈인사를 건넨다.
너도 또 왔구나.
서로가 문제인 걸 잘 안다.
언젠가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에서도 눈인사를 건네지 않을까 싶었다.
중앙의 젊은 남녀를 흘깃 보다가 아까 그 사복 경찰이 경찰봉을 들고 툭 툭 구둣발을 치는 동작이 눈에 걸렸다.
뭔가 이상하다.
계속 쳐다볼 수는 없어서 일정 간격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빠르게 훑어 내렸다.
경찰봉 끝에 구멍이 나 있고 손잡이 쪽에 버튼이 달려 있다.
'저런 건 처음 보는데… 아 뭐 상관없겠지.'
지나치게 주변을 살피는 일은 피곤하다.
술이나 마셔야지.
30분 지났나?
아직 이른 것 같기도 한데.
술잔을 손아귀에서 떼구르르 돌리며 입맛을 다시는데 젊은 남자의 고함소리가 음악소리를 누르며 들려왔다.
"왜 자꾸 쳐다보냐고. 늙어빠진 쓰레기 주제에."
중앙에 자리 잡았던 젊은 남자다.
시비가 붙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는데 포켓에 자동차 키링이 흔들린다.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아까의 그 부학생회장인가 하는 녀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쪽을 보니 그녀였다.
데이트 중인가.
학생들이 돈도 많네.
"그만해 필."
여자애도 따라 일어나며 말린다.
필이라는 남자애는 얼굴이 흥분과 술기운으로 뻘게져 있었다.
이제 바 안의 모두가 경찰을 쳐다보았다.
'이제 나도 자세히 쳐다봐도 되겠군.'
경찰은 씩 웃고 있었다.
여유가 있다.
다행이다. 좀 혼내고 말려나.
"일어나 봐 병신아. 쫄았냐?"
여자애가 말리자 필이 더욱 다가서서는 윽박지른다.
말투가 딱 시비 거는 어린애를 닮았다.
경찰이 천천히 일어나며 느물거렸다.
"가슴이 커서 좀 봤다. 왜, 니꺼냐? 만져 봤냐?"
동료 경찰로 보이는 일행이 웃음을 터트렸다.
"필. 이 사람들 형사야."
여자애가 나섰다.
여자 쪽이라도 눈썰미가 있어서 다행이다.
남자애는 자리에 돌아가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뭐 형사 아니라 치지.
새끼가 얼이 빠져가지고.
술 마시고 지랄- 이야."
말 끝자락과 함께 경찰봉이 쌔액 하고 돌았다.
얼굴 한가운데를 가격했다.
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을 굴렀다.
맥은 술을 홀짝 마셨다.
30분을 못 지키고 있어.
쌔한 알코올이 위장을 다 돌았는데도 구타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만 하세요. 이만하면 됐잖아요."
여자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이쁜이는 가만히 있-어. 이놈 먼저 손 보-고."
말 끝마다 후려친다.
남자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지 않다.
대충 끝낼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찰 나리. 그러다 감방 가시겠어요."
그가 경찰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짝 올린 거 같지만 엄지를 꾹 눌러 넣어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경찰이 고개를 돌리는데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지나치게 흥분했어. 이거 제정신 맞나.'
조직에 막 뛰어든 애들 중에 이런 녀석이 가끔 있었다.
폭력을 가할수록 흥분하고, 그걸 잊지 못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천직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 폭력에 되려 죽음을 맞는다.
경찰이나 조직이나 가느다란 선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이 경찰도 그런 타입인 듯 했다.
예상한 것처럼 경찰의 주먹이 날아왔다.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느라 경찰봉 쪽의 어깨를 놓쳤다.
"어쭈. 피했냐? 너 뭐-냐?"
말을 늘이면서 힘을 주며 휘두르는 습관이 있다.
타이밍을 재기 쉽다.
뒤로 물러서면서 여자애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몇 차례 더 공방이 벌어지는 중에 그녀가 남자애를 부축하고 일어나는 게 보였다.
체구에 비해 가뿐하게 들어 업고 문을 나서는 게 기특했다.
'눈치가 빠르네.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뒤돌아 그의 눈과 마주쳤다.
걱정해 주는 건가.
기지가 있는 여자라 5분 정도만 더 시간을 끌어 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 새끼 봐라…"
경찰이 휘두르는 걸 그만두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슬그머니 등 뒤로 손을 뻗어 카운터를 훑었다.
물잔이 하나 집힌다.
역시나 경찰이 총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는 게 보인다.
총구가 다 올라오기 전에 팔을 던져 얼굴에 맞춰 잔을 터트렸다.
이건 시간을 끌 수 있다.
물이 얼굴에 뿌려지면 본능적으로 닦으려 하는데 조각난 유리가 얼굴을 긁는다.
술집에서 싸울 때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유리가 눈에라도 들어가 주면 더 좋고.
시간을 벌었다 싶어 문으로 뛰는 데 사람들의 비명이 다시 들렸다.
어이쿠. 대응이 빠르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마구 쏘는 건가 싶었는데 어깨에 퍽 하니 충격이 덮쳤다.
관성으로 비틀거리며 바를 나섰다.
온 힘을 다해 뛰어서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중요하다.
그럼 방향을 잡을 수 없으니 십중팔구 놓치게 된다.
어깨의 상처를 보니 총알이 관통했다.
뼈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후디 안에 입은 티를 찢어 감쌌다.
골목에 숨어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집에 들어갔다.
남기고 온 술이 그리웠다.
총을 맞다니 운이 없는 날이다.
키즈가 또 한동안 까댈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