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깊숙이 뚫어보면서
오랫동안 나는 거기 서 있었지.
이상히 여기며,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전엔 감히 꿈꾸지 못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꿈꾸면서.
- 에드거 앨런 포
[까마귀의 고해]
2부 1장 지옥에서의 첫째 날
케이는 반쯤 괴물이 된 까마귀를 안고 검은 공간을 흐른다.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암흑이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를 꼭 붙잡는다.
그도 그녀를 붙잡지만 사뭇 다르다.
벌려진 입에서 침이 흐르고 거친 손길이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케이의 어깨끈을 찢어 내리고 허리를 강하게 당긴다.
그녀는 아픔에 신음한다.
다른 손이 허벅지를 따라 움직이다 그녀의 가장 부드러운 살에 손가락이 파고든다.
케이는 당황해서 그를 밀어내려 하지만 까마귀는 엄청난 힘으로 여자를 조인다.
입술이 그녀의 얼굴을 덮는다.
열린 입안으로 모든 걸 삼켜버릴 것만 같은 까만 허공이 보인다.
그의 입이 여자의 눈과 코와 입술을 핥고 삼킨다.
그녀는 발버둥 치고 그의 등을 때려보지만 까마귀는 끄떡없다.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린다.
피에 대한 갈망이 다른 흐름으로 바뀌어 폭풍처럼 몸을 흔든다.
까마귀의 눈알이 조금씩 옅어져 잿빛으로 변한다.
케이의 비명이 리듬을 타고 커진다.
까마귀는 폭발한다.
흰자가 서서히 돌아온다.
“피오나.”
까마귀가 말한다.
그 이름에 케이는 울면서 까마귀를 밀어낸다.
이번엔 더 필사적이다.
길게 자랐던 까마귀의 머리털이 원래대로 줄어든다.
힘이 빠진다.
케이는 겨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다.
차갑고 검은 돌 위에 털썩털썩 차례로 떨어진다.
까마귀는 정신을 잃는다.
눈을 뜨고 회색 구름을 바라본다.
공장의 연기가 도시를 덮은 것처럼 낮고 무겁게 깔려 있다.
해는 보이지 않지만 깜깜하지는 않다.
낮이다.
그림자를 먼저 관찰한다.
옅고 흐리다.
바닥에 날카롭고 커다란 바위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늘어서 있다.
바위로 만들어진 산이 생겼다가 금세 허물어진다.
바닥이 조금 솟아오르는 듯싶더니 그극-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인다.
바위가 흐른다.
서로 부딪치며 돌가루가 튀고 커다란 바위가 빙산처럼 쪼개져 떨어진다.
몸이 흔들려 넘어지려 하자 무언가를 붙잡는다.
부드러운 여자애의 살이 잡힌다.
케이가 쓰러져 있다.
블라우스가 풀어 헤쳐져 있고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차가운 바위에 다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진 모습이다.
그녀를 끌어안고 일으켜 뺨을 톡톡 쳐 본다.
그녀도 눈을 뜬다.
그를 보더니 반사적으로 밀쳐낸다.
평소처럼 웃지도 않고 농담을 하지도 않는다.
그냥 먹먹하게 주위를 둘러볼 뿐이다.
그는 케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묵직한 돌덩어리가 옆으로 떨어져 내린다.
위험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킨다.
그녀는 그 손을 떨쳐내려 저항하지만 그가 끌어당긴다.
흘러내리는 바위를 뛰어넘어 그나마 안정된 쪽을 향해 이동한다.
“불에 덴 곳은 괜찮니?”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그가 묻는다.
그제야 그녀는 그를 바라본다.
“옆구리가 좀 쓸리긴 하지만.”
어깨 위로 옷을 끌 올리면서 말한다.
“근데 어디 가요?”
“바다로.”
그는 손을 뻗어 우뚝 솟은 붉은 바위산 너머를 가리킨다.
“소금 냄새가 나.”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코가 개코네요.”
그는 아무 대답 없이 걷는다.
“옷은 왜 그런 거냐?”
어깨를 연신 걷어 올리는 그녀를 보고 그가 묻는다.
“글쎄요. 왜 그럴까요?”
그제서야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케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롭다.
‘화가 나 있는 거 같은데.’
그는 생각한다.
“어쨌든 저쪽이 땅이 좀 덜 흘러. 빨리 가자.”
생각만 할 뿐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재촉해서 끌고 간다.
그들은 높은 바위산 중턱에서 거인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저절로 발이 멈춘다.
5미터가 넘는 키에 온몸이 울퉁불퉁한 바위 빛 근육으로 덮여 있다.
돌로 만든 수레바퀴를 굴리며 산 위로 올리려 노력하는 중이다.
땅에 박혀있는 작은 바위가 마치 쐐기처럼 수레 틀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고 있다.
거인은 답답한지 소리를 낸다.
아우아아아이.
뒤로 수레바퀴를 뺐다가 다시 밀어 올려보지만 더 이상은 올라가지 않는다.
저 멀리 거대한 네 발 짐승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안개 너머로 움직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긍-하고 땅이 울리고, 고개를 들면 고오오오오-하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리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에요?”
장대한 짐승을 바라보며 케이가 말한다.
그도 모른다.
기억에 남아있는 마지막 장면은 케이가 불탈 뻔한 상황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런 황량한 세계일 뿐.
오히려 그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거인은 뭘 하는 거예요?”
“시지프스 같은데. 저걸 산 위로 올리는 거야.”
“뭐라구요?”
“시지프스 말야. 그러니까 역사 시간에 수업을 들어야지. 나이트 같은 데 가지 말고.”
“저도 알아요. 수레바퀴를 들고 지탱하는 형벌을 받은 거인이죠.”
“그건 아틀라스야. 하늘을 떠받치는 거야.”
“잘나셨어.”
톡 쏘는 모습이 다시 예전과 비슷해져 가고 있다.
싸움의 충격에 우울해졌던 거라면 회복이 빠른 여자애다.
아니면 이 나이쯤의 애들이 다 그렇던가.
거인이 다시 아우우우 하고 소리를 낸다.
“불쌍해.”
케이가 말한다.
“어떻게 좀 해줘 봐요. 오빠.”
‘오빠라고? 지금 오빠라고 불렀나.’
그는 왜 사장님에서 오빠가 된 건지 궁금하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차마 물어보지는 못한 채, 돌 그림자를 튕겨 쐐기를 뽑아 낸다.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거인은 아우우우오-하고 올라간다.
거인의 목소리에 희망 같은 건 없다.
어차피 올라가면 다시 내려 올 텐데.
그것까지 케이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는 무한한 수레바퀴와 사람의 인생과 오빠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근데 오빠.”
“왜?”
“배가 고파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먹을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이다.
▶ [세계관] 까마귀의 고해 2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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