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손잡이는 120도 각도로 살짝 내려놓는다.
아무렇게나 닫아도 문은 잠기지만 이 각도로 고정시키는 건 숙련되지 않으면 어렵다.
누군가 침입했을 경우 알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이 삶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 인간의 증명 ]
2장
"오늘 그가 또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입니다.
헤라클레스.
엄청난 힘으로 조직 폭력배들을 소탕한 후 평화를 상징하는 꽃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사나이.
그는 과연 범죄자일까요? 영웅일까요?
심지어 인터넷에는 그의 팬사이트까지 등장했는데요.
현장에 기자를…"
커튼이 두껍게 드리워 있어 어두운 거실에 벽걸이TV만 조명을 뿌린다.
방송에서는 마침 어제의 그 현장이 나오고 있다.
카메라의 진입을 통제하려는 경관들과 구경 온 근처 회사원들과 기자들이 얽히고설키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지나간다.
테이블 위에는 편의점에서 나올 법한 음식물의 쓰레기들과 '30살이 되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널브러져 있다.
커다란 거실에 덩그러니 있는 두 칸짜리 소파 위에 20대 중반의 남자가 다듬지 않은 수염이 듬성등성 나 있는 얼굴로 몸을 배배 꼬며 신음하고 있다.
감긴 눈을 억지로 뜬다.
커튼 사이를 용케 뚫고 들어 온 저녁의 노란 햇살이 눈을 찌른다.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신 게 화근이다.
'그래도 술집에서는 딱 한 병만 마셨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다.
목을 움직일 때마다 야구방망이에 맞은 왼쪽 목덜미가 욱신거린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집에 들어와서도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것 같다.
'집에 술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람.'
손을 보니 차분했다.
덜덜 떨리지 않는다.
테이블 위의 비닐봉투를 열어 술병을 몇 개 찾아낸다.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을 사오는군.'
봉투에서 같이 찾은 미직저근한 캔 커피를 따 들고 창가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부서진 화분 조각이 발바닥에 집혀 발로 슥슥 밀어내 공간을 만든다.
6층이긴 하지만 훨씬 더 높은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는 도심 복판의 고급 빌라라서 탁 트인 숲이나 강은 꿈도 못 꾼다.
낮에는 일관된 잿빛 빌딩과 직장인들, 밤에는 너무 색이 많아서 무슨 색을 써도 다 똑같이 보이는 네온사인들과 술집들이 대비되는 곳이다.
조직 사무소가 가깝다는 이유로 토라가 한 방에 구입했었지.
자연스럽게 눈이 테이블 위의 사진을 본다.
20대 후반의 여성과 10대 소년이 나란히 웃고 있다.
자세히 보면 눈은 그렇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가 죽자 집에 가끔이라도 들어오던 어머니는 미련 없이 떠났다.
어린 학생이었던 그를 이복누나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 집으로 데려왔는데 그게 토라였다.
아버지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서 정말 이복누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도, 토라도 똑같이 조직에서 일하다가 죽어갔다.
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처럼 죽겠지.'
아직도 멍한 눈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는 그들보다 더 빠를 수도 있겠군.'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토라의 시체를 확인하고 집에 와서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아니, 정말 그랬나?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다.
건너편 빌딩 한쪽에 재떨이가 있는 휴지통이 있다.
길 하나 간격이라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손에 들고 담소를 나누는 회사원들의 소리가 잘 들려온다.
토라는 바로 옆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었다.
그녀는 저들을 싫어했다.
저것들 저렇게 사는 게 뭐 불만이라고
직장 상사 욕이며 여자친구 욕이며 와이프 욕이며,
지 행복한 줄 알아야지. 어?
하루하루를 총구 앞에서 살아 보던가.
그는 그래도 그들이 부러웠다.
잔잔한 불평을 담배와 함께 날려버릴 수 있는 평온한 일상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빌딩 반대편인가?
대로변에 방송국 차도 보이고 확성기 소리도 들려온다.
게다가 같은 소리가 거실 TV에서도 한 간격 늦게 또 들려온다.
차 옆면에 NBC라는 마크가 보인다.
연쇄 살인이라도 발생한 건가?
호기심에 담배를 비벼 끄고 거실로 돌아와 TV의 볼륨을 올렸다.
"….제약회사는 결국 보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에 해당 대학생들이 오늘부터 시위를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회사 건물 앞에는 지금 다수의 학생이 모여 있습니다.
문제의 그 약을 복용한 여학생들이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젊은 애들이 피켓과 커다란 천을 흔들며 카메라를 보고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진지하지만 일부는 웃고 있기도 했다.
'다들 신나게 사는군.'
그에게는 시위마저도 부러운 일상이었다.
테이블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몇 달째 열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한 번 진동 하더니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바보 같은 게임이 날 찢어놓고 있어.
쥬얼의 노래가 망연한 생각에서 그를 깨웠다.
토라가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그리움보다는 잊지 않으려고 벨 소리에 지정해 넣었다.
폴더를 열었다.
"전화 좀 빨리 받아. 맥. 또 술 먹고 자빠져 있었지?"
"용건만 말해."
"긴급 상황이래 맥. 보스 호출이야."
'항상 긴급 상황이지'
그래도 그는 한때 조직의 촉망 받던 인재답게 옷을 후다닥 챙겨입고 문을 나섰다.
문 손잡이는 120도 각도로 살짝 내려놓는다.
아무렇게나 닫아도 문은 잠기지만 이 각도로 고정시키는 건 숙련되지 않으면 어렵다.
누군가 침입했을 경우 알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이 삶을 더 연장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