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감정은 어때? 뭔가를 갖고 싶다거나.
괴롭다거나 그런 건?”
“그런 것도 없어요.
배고픔 같은 거, 맞고 나면 몸이 쑤시는 감각들은 있죠.”
“그런 건 몸이 반응하는 거니까.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호옴.”
[ 그녀가 세상을 보는 법 ]
6장
핸드폰을 내려놓고 총을 사무실 서랍에 넣었다.
거기엔 이미 총이 한 자루 있어서 잘 어울렸다.
책상 뒤쪽에 쌓아 놓은 옷더미에서 내일 입을 옷을 뽑았다.
가격이 많이 나가는 것들은 대부분 팔았다.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우던 때에 비하면 부피가 많이 줄었다.
구두는 잘 팔리지 않아서 흥신소의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사무소 신발장 가득 힐과 펌프스와 플랫들을 가지런히 꽂아 넣는 걸 보던 사장은 한숨을 쉬며 맥에게 말했다.
“아따 이 여자 뭐하던 여자냐?”
“총을 잘 쏴. 침착하고. 보디가드로 생각하면 네 목숨 값은 할 거다.”
“내 목숨 값은 헐값이니끼, 월급은 아주 낮게 쳐줘도 되겠구만.”
사장은 끅끅거리며 웃었다.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사장이 어딘가 차를 몰고 가서 마냥 죽치고 있으면 총을 허벅지 사이에 숨기고 멍하니 있으면 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사진을 연방 찍는다.
그래도 멍하니 있으면 된다.
그러다 차를 몰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적당히 청소도 하고 사진 정리도 하고 그러다 잠들면 하루가 지난다.
다른 사람을 상대할 일도 없어서 좋다.
사장도 가끔 혼잣말처럼 얘길 하는 걸 빼면 말수도 거의 없다.
그나마 대꾸를 안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제가 정말 하는 일이 있는 건가요?”
한 번은 먼저 이렇게 물었다.
“가끔. 정말 위험한 일이 생긴다야. 전에 폭력간부 놈의 정부인 줄 모르고 사진을 찍었는디 말여 양복놈들헌티 몰매 맞아 죽을 뻔 했지비. 어제 그노마 녀석이 막아주지 않았으면 거기서 인생 종쳤을 기야.”
오후에는 반차를 쓰고 의사에게 연락해서 첫 상담을 다녀왔다.
사장은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휴가라는 기냐-라고 투덜댔지만 허락은 해 줬다.
의사는 꾸부정하게 서 있는 모양이 50대 후반으로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조용조용한 말투로 얘기하는 노인이었다.
남편은 세계 지식인 포럼에서 만났다고 했다.
도시국가 셋이 모여 세계 지식인 어쩌구 하는 게 웃기지? 하며 호호 웃었다.
느리고 나긋나긋한 말투가 여성스럽기까지 했다.
남편이 그러던데 부인이 특이한 사람이라 하대하며 얘길 시작했다.
“어떤 문제로 오셨어?”
“남편이 저보고 사이코패스라고 가보래서요.”
그 말을 듣더니 오호호-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존칭어를 좀 쓰는 듯 하더니 바로 반말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몰라서 그런 거 같아요.
제가 그들을 아프게나 슬프게나 화나게 하거나 하죠.”
의사는 안경을 연신 올리며 뇌 MRI 사진을 살펴보았다.
“사이코패스는 주로 전두엽에 손상이 생겼을 때 생기는데 부인은 그런 건 안 보여. 살아온 얘길 해 봐.”
“특별할 건 없어요. 학교에서는 말이 없어서 도도한 아이로 취급받았죠. 졸업하고 몇몇 회사를 다니다가 결혼한 거에요. 그게 제 인생이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
“몰라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양부모 밑에서 자랐거든요.”
“흠 그럼 양부모님들은?”
“그분들도 제가 6살 때 돌아가셨어요. 강도가 들어서 두 분 다 살해되셨대요.”
“남의 얘기처럼 하는데, 본인은 그 자리에 없으셨나?”
“자고 있었어요. 그 즈음의 기억이 없어요. 워낙 어려서라서 그런지.”
“감정을 잘 모른다는 얘길 더 해봐.”
의사가 펜을 들더니 종이에 서걱서걱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전의 회사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얘기했다.
한참 듣던 의사가 물었다.
“자신의 감정은 어때? 뭔가를 갖고 싶다거나. 괴롭다거나 그런 건?”
“그런 것도 없어요. 배고픔 같은 거, 맞고 나면 몸이 쑤시는 감각들은 있죠.”
“그런 건 몸이 반응하는 거니까. 감정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호옴.”
또 서걱서걱 펜을 놀리더니 그 종이를 쑥 내밀었다.
“이걸 들고 약국에 가 봐. 약물치료를 시작해 봅시다. 감정의 변화가 있으면 다음 상담 때 얘기해줘봐요.”
그녀는 문을 닫고 나와 슬쩍 읽어보았다.
일정한 각도로 꼼꼼하게 기울어진 글자들이 보였다.
대부분 처음 보는 단어들이었다.
병원 앞에서 버스를 탔다.
다 팔고 딱 하나 남긴 백이 에르메스여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래도 버스에 오르자 사람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2년간 차를 타고 다녀서 버스노선은 거의 잊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기억이 남아있다.
중학교를 다니던 노선이다.
고등학교 가서야 키가 쑤욱 커졌다.
당시엔 조그만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혼자 떨어져 있는 조그만 소녀.
요금을 몰라 버스 기사에게 물어봤다.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 버스가 도시의 길바닥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창 밖을 멍하니 보다 보니 사무소 근처다.
마트에 들러 빨래 건조대와 빵을 사 들고 모퉁이를 돌았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건 엄마, 이건 아빠. 하면서 조곤조곤하게 속삭인다.
어른이 다가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어 방해하지 않고 지나갔다.
누군가 골목으로 후다닥 뛰어들어와 그녀를 덮쳤다.
몸을 비트느라 시야에 들어온 게 다행이었다.
빨래건조대를 집어 던져 공간을 만들고 백을 더듬어 총을 꺼냈다.
겨누고 보니 남편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뺨과 손등과 회색 셔츠 곳곳에 핏자국이 보인다.
“너…”
그의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이건 술에 취했을 때, 정신을 잃을 때, 잠에서 깰 때의 표정인데 지금 무엇에도 맞지 않는다.
모르는 표정은 조심해야 한다.
“이제 더 볼 일 없을 텐데?”
총으로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만 좀 따라다녀. 나도 죽일 셈인가?”
“무슨 소리야?”
“휘트먼을 죽였잖아. 눈을 파서.”
“눈을 파긴 했는데… 죽었나?”
“죽었지. 넌 정말로 사이코패스였어. 처음부터 그랬어. 결혼도 돈 때문이지? 내가 변호사와 상의하지 않았으면 날 죽이고 내 재산을…”
“시끄러워요 방해되잖아요.”
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자애가 고개를 들어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리 꺼져.”
남편이 소리 질렀다.
아이는 멍하니 반응이 없었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남편이 터벅 다가가더니 모질게 머리채를 잡아 눌렀다.
“그만 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남편은 멈추지 않고 팔을 들어 올렸다.
아이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만 하라니까!”
그리고 귀가 먹먹하더니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꿉놀이하던 소녀가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남편 크기의 검은 그림자가 그 위에 드리우고 문이 쾅 닫힌다.
두런두런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소녀의 눈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저건 뭐였더라.
공포, 졸림, 체념, 고통.
너무 많은 표정이 섞여 있잖아.
해독이 힘들어.
피곤해.
악몽에 놀라 벌떡 일어났더니 사무소였다.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다.
꿈을 꿨다.
어디까지가 꿈이지?
총을 꺼내 총알을 세 보았다.
가득 차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칼칼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들었다.
백에 보니 어제 처방받은 약이 있었다.
병원까지는 현실이다.
빨래 건조대가 침상 옆에 기대어 있었다.
모서리에 흙이 달라붙어 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이번엔 12시간을 잃었다.
알약을 정량대로 삼켰다.
타이레놀을 찾아 두 알을 먹고 침상에 다시 누웠다.
얼굴을 씻고 자야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왜 출근하지 않았지?
8시면 나와야 할 사람인데.
그런데 방금 본 거 같은데.
어디서였지?
그녀는 홀린 듯이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실 문을 열고 사장의 잘린 목을 마주했다.
그녀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