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더 진행하다간 큰일 나겠네.”
최면에서 덜 깨어난 채 일어나서 병원을 나섰다.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는다.
팔이 아픈지도 느끼지 못한 채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그녀가 세상을 보는 법 ]
9장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히고 숨을 천천히 쉬어요.”
의사는 커다란 책상 뒤편에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마음은 항상 가라앉아 있다.
약을 먹어서 그런지 눈이 뻑뻑하고 의사의 형태가 울렁울렁거렸다.
그가 기록해 놓은 노트와 처방전의 글자들도 구불구불하게 보였다.
소파에 누운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셋을 세면 한 단계씩 과거로 돌아가 보는 거야아. 깨어나세요. 하면 일어나는 거지이-”
그의 말도 늘어져 들린다.
증세가 심각해진다는 얘길 듣고 최면요법을 써 보자고 했다.
몸이 나른하다.
“자. 이제 최근 일부터 조금씩 거꾸로 떠올려 봐. 어제 누굴 만났지?”
최근엔 형사 말고는 만나는 사람도 없다.
사건에 대한 얘기도 하지만 잡담이 더 많다.
그녀에게는 친구도 없었고 일도 없어져 버려서 그와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유일한 일이 되었다.
그녀가 가끔 대꾸하는 정도로도 혼자 얘기를 많이 했다.
남편처럼 잘난 척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만났던 대부분의 남자는 자기자랑이 필수였다.
그가 맡았던 사건들 얘기,
어린 시절에 넓은 공터에서 뛰어놀던 얘기,
해변에서 보았던 거대한 물고기의 난동,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다는 여동생 얘기.
들으면서 그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말을 하면서 이런 느낌이었죠 하면 그게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정 읽는 공부가 되는 사람이다.
당신은 꽤 버티네요.
저랑은 몇 마디 하면 상처 입고 가버리던데.
형사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었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입이 달짝달짝 하는 게 그녀 자신이 생각을 말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꿈 같기도 하고.
“좀 더 과거로 가봐요.”
초등학교 때 교실에 고양이가 한 마리 들어온 적이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이 둘러싸고 막대기로 찌르고 책으로 때리고 괴롭혔다.
그날 그녀는 심하게 싸웠던 거 같다.
얼굴도 상하고 긁힌 자국들이 많아서 싸움은 나쁜 거라고,
고아원 원장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다.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지?
원장이 물었다.
아니 이건 사실이 아니다.
원장에게 고양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정수리에 송곳이 하나 퍽 박히는 것 같았다.
첫 회사에서는 손버릇이 나쁜 대리가 있었다.
회식 때마다 그녀에게 술을 먹이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취하든 취하지 않든 옆자리에 앉아 집에 데려다 줄까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니 그쪽으로 말고. 더 예전으로 돌아가야지. 양부모님을 떠올려 봐요.”
양어머니는 부유한 집에 결혼해 들어온 젊은 여자였다.
옷도 잘 차려입고 말도 나직하게 하고.
그런데 양어머니는 그녀를 미워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원장이 오래전 그 집에 나타나 꼬마 오드리에게 의사의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을 보면 알아요.
증오.
아무도 없을 때 저를 가만히 보면서 그런 얼굴로 노려보곤 했어요.
“양아버지도 널 미워했나?”
고아원 원장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시 물었다.
그는 잘 해 줬었다.
밥을 잘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관심도 많았다.
그녀를 볼 때 전혀 나쁜 종류의 표정은 없었다.
“6월 16일로 넘어가 보자. 그날 아침은 기억나시나?”
머리에 송곳이 하나 더 박힌다.
조금은 기억이 난다.
그날 일어나서 토스트를 먹었다.
양아버지가 늦게 일어나는 날은 아침 식사 대신 토스트를 먹었는데 그녀는 그걸 더 좋아했다.
입술에 닿을 때 바스락거리는 촉감과 떨어지는 빵가루.
살짝 까맣게 익은 모서리의 쌉쌀한 느낌도 좋았다.
잼은 평상시엔 손댈 수 없었는데 양아버지가 기분 좋은 날은 직접 발라주기도 했다.
그럼 게걸스럽게 그걸 먹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낮에 꼭 몸이 아팠다.
양어머니가 더 많이 노려봐서였을까.
잼 먹는 게 그렇게 싫었을까.
유치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누워서 잠을 잤다.
그래서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문밖에서 그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그게 강도와 싸우는 소리였던 거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양아버지가 바싹 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구레나룻이 턱을 간질였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심장 박동에 맞춰 두근거렸다.
소파와 함께 자신이 빙글빙글 돈다.
아. 왼팔이 심하게 아파왔다.
고아원 원장이 칼로 그녀의 왼손을 그어대고 있었다.
한번, 두 번.
'그만해. 저년한테 피가 나잖아.'
양어머니가 말로는 말리고 있었지만 얼굴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까만 밤의 저택의 장면이 휘번뜩 사라지고 의사의 얼굴이 보였다.
눈의 초점을 맞추고 보니 의사가 그녀의 왼팔을 움켜잡고 있다.
팔을 들어 보니 심하게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다.
“계속 책상 모서리를 치더군. 잘 깨어나지 않아서 위험했어.”
의사가 붕대로 대충 말아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더 진행하다간 큰일 나겠네.”
최면에서 덜 깨어난 채 일어나서 병원을 나섰다.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는다.
팔이 아픈지도 느끼지 못한 채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잭은 숨어 지내던 원룸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목의 무수한 상처에서 나온 붉은 피가 침대를 흥건히 물들였다.
살인자는 의자 등에 팔을 괴고 피가 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숨이 멈추자 눈을 파내고 손목과 머리를 잘라냈다.
희생자에게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에 대해서는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쪽 손이 불편한지 칼을 든 손만으로 모든 걸 처리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른 것들을 비닐에 담고 가방에 싸서 방을 나왔다.
눈알이 하나 떨어져 복도를 도르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