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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Game _ 게임 이야기/최강의군단(Herowarz)

[최강의군단] 그녀가 세상을 보는 법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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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처음 본 날 있잖아. 당신이 웃는 걸 봤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눈에 물이 고이면 하품, 슬픔, 감동 중 하나. 

이게 슬픔일까.





[ 그녀가 세상을 보는 법 ]


12장

“아이고 오늘은 늦게까지 일이 많은 날이네.” 


의사가 안락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책상 쪽으로 몸을 숙인 채 일어나지도 않고 말했다.


“급한 일이 있다고?”
“증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요. 게다가-”


의사는 슥슥 뭔가를 쓴다.


“정신을 차리면 손에 피가 묻어 있어요. 최근엔-”
“약은 잘 먹고 있나?” 


의사가 일어나 문가로 가며 말했다. 

피 얘기를 해도 평온한 말투다.


“잠시만 기다려요. 필요한 게 있어.”

그녀는 책상을 멍하니 보았다. 

노트에 구불구불 엉망인 글자들이 보인다.
어라. 

처음엔 분명 반듯하게 기울어진 필체였는데? 


의사가 바뀌었을 리는 없다.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엔 오른손으로 쓰고 있었다. 

최근에는 왼손으로 쓴다. 

어디선가 다쳤을 수도 있겠지. 

류머티즘일 수도 있고.
 
노트를 누르고 있는 문진을 만져 보았다. 

검붉은 얼룩이 져 있다. 

긁어보니 피다. 

방금 내 손에서 뭍은 피인가. 

그러기엔 너무…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의사가 소리 없이 들어와 있었다. 

허리가 평소와는 달리 곧추서 있다.
소파를 보니 백이 없었다.
 
“총은 치웠어. 자리에 앉지. 중요한 상담이니까. 오늘은 말야.”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 

말투가 빨라졌다. 

억양도 다르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넌 참 흥미로운 환자야. 그동안 널 따라다니는 게 너무 재미있었는데.” 


의자에 털썩 앉으며 실실거렸다. 


“뭐가 흥미로운데?”
“넌 사이코패스가 아냐. 남의 감정을 무시하는 건 나와 비슷하지만 난 내 감정에는 아-주 충실하거든. 너는 감정 자체를 전부 억눌러 온거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앉지 그래? 얘기가 길어.”


자리에 앉았다. 

오른손에는 문진을 꼭 쥐고.


“네 양부모가 죽는 날이 시작이었을 테지. 네가 최면 상태에서 한 동작들로 추리해 보면 말야.”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동작?”
“들어봐.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려줄게. 넌 누워서 누군가를 계속 밀어내려 하더군. 그러다 뭔가를 쥔 손 모양으로 마구 찌르고 베었어. 강도가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지? 그건 네가 찔러 죽인 걸 거야.”
“왜?”
“양아버지가 널 건드렸겠지. 네가 어떻게든 칼을 준비한 걸 보면 처음은 아니었을 거고. 네 양어머니가 널 대하던 태도를 보면 확실해. 아, 그녀가 칼을 줬을 수도 있겠군.” 


그는 말을 이었다.


“더 재밌는 게 뭔지 알려줄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이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는 종종 있어. 그래도 감각은 남거든. 허기, 불안, 성욕 이런 거 말야. 성적인 행위에만 무감각해진 이유도 그래서 일 거야. 참 안됐어. 빈껍데기로 25년을 살아온 느낌이 어때?” 


대답이 없어도 의사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는 그때의 기억을 뇌 어딘가 깊숙이 밀어 넣었겠지. 안 그러면 그 나이 여자아이의 작은 머리로는 버틸 수 없었을 거야. 그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감정도 전부.” 
“그게 가능해?”
“어렵지.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야. 시간을 건너뛰는 거. 그래서 더 즐거웠다는 거 아니겠나. 암페타민으로 그걸 더 증폭시켜도 봤지.”
“치료 약이 아니었군.”
“네가 정신없이 다닐 때마다 하나씩 처리했어. 증거물들은 다 네 사무소에 옮기고.”
“왜 그들이었지?”
“내 맘이지 뭐. 내가 아끼는 연구 대상을 다른 누군가가 보거나 만지는 게 싫어. 게다가 그 인간들 지갑도 두둑하고.”


그는 서랍을 열어 총을 꺼냈다. 

우 형사의 총이다. 

오전에 10분 정도 저 총을 노려보고 있었지. 


“그도 죽였어?”
“그 노란 놈? 그럼. 네가 전화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머리를 못 잘라왔어. 여기서 턱 꺼내 놓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아무튼.”


공이를 당기며 말했다.

“이제 보내 줄게. 감정도 쾌락도 없이 살아서 뭐 하겠나. 아아 그건 내려놔. 던지기라도 하려고? 말했잖아. 소중한 증거물이야. 사이코패스 여자가 모두를 죽이고 그 형사까지 죽이려다 총에 맞아 같이 죽는다. 얼마나 깔끔해.” 


그녀는 문진을 떨궜다. 


“그래 자알- 했어. 좀 더 뒤로 물러나. 시체를 옮겨야 하니까. 피가 카펫에 떨어지면 귀찮아. 오. 거기까지.”
 
그녀는 거의 방 가장자리까지 물러났다. 

두 걸음 정도면 벽에 닿을 듯했다.
문과 그녀 사이에 의사가 자리 잡고 있어서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맞는지도 모른다. 

이제 원인을 알았다 해도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대로 할 줄 아는 일도 없다.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친구를 만들 수도 없다. 


친구? 

그래, 그는 친구가 되어 준다고 했었는데. 

이런 나라도 좋다고.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이 피로 덮인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가 들어 올린 총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바닥에 몸을 던졌다. 


의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뒤돌아 총을 쏘았다.

여러 번의 총성이 울리고 의사가 뒤로 와당탕 넘어갔다. 

의사가 떨어뜨린 총을 집으며 보니 눈에 총알구멍이 나 있었다.


문간으로 가서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지려는 형사를 잡았다. 

아직 의식이 붙어 있어서 그녀를 알아보았다.

“역시 당신이 범인이 아니었어. 의심해서 미…” 


입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넘어왔다. 

칼에 심하게 베인데다 총알도 몇 개 박힌 거 같았다.


“처방전이… 이상했어. 오전에 그 얘길 다 끝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쿨럭쿨럭 기침할 때마다 한 움큼의 피와 조직 같은 게 같이 나왔다.
이 사람 죽겠구나.

“왜 이렇게…”
“처음 본 날 있잖아. 당신이 웃는 걸 봤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눈에 물이 고이면 하품, 슬픔, 감동 중 하나. 

이게 슬픔일까.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에 형사의 손가락이 닿았다가, 이내 툭 떨어졌다.
모든 감정이 가슴에서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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