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펑크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상까지 다루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음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사회에서 '갈등의 씨앗'이 될만한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완벽한 사회란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는 뜻과 같다. 고로 어딘가에는 의견이 충돌하거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페이퍼 펑크 사회에는 이미 상당한 갈등 요소가 드러나 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자꾸 의문처럼 치고 들어오는 것들을 따로 기록해두었었다.
기록물에 대한 부정
가장 먼저 떠오른 사례다. 사실 완벽하지는 않다고 해도, 현대사회에서도 기록물의 중요성은 인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는 사람의 증언보다 유형의 증거물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록이 그것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니까.
또,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다룰 때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심증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설득력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망상병 환자들은 예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근거 없이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있다. 페이퍼 펑크 사회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카이브에 보관된 기록물을 근거로 활용하게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누군가는 근거 없이 심증으로만, 혹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만 이야기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행위를 범법으로 규정할 것인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맥락으로 그냥 떠들게 놔둬야할지는 세계관 설정 단위에서 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설정을 활용해 어떤 이야기를 구상할 때에야 구체적으로 정할 사항이다.
다만, 이것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어지간하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말을 믿는 편이지만, 혹시 또 모른다. '휴리스틱'이 발동해 나도 모르게 그냥 믿고 넘어가버리는 것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정보 접근의 불균형
"아카이브의 정보는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다"라는 건 사실 이상적인 발상이다. 아카이브를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고, 누군가는 그 시스템을 운영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누군가는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기록물 관리 권한'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이야기를 구상할 때 정할 사항이다. 다만, 특정 기록물에 대해서는 '제한된 접근 권한'을 설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글쎄, 어쩌면 '욕심'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종족이 있다면, 혹은 그런 존재가 있다면 공정한 아카이브 운영이라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철저하게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같은 존재가 더 이상의 프로그램 수정을 허용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대로 아카이브를 운영한다면 어떨지도 상상해봤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도 가져본다. 평등이라는 건 때로는 의도적으로 불균형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의문만 던져두지만, 아무튼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주제다.
기록물의 진위&상충 문제
전문 자격을 갖춘 이에 의한 기록물 인증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지와는 별개 문제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옳은 결정만 한다는 보장은 없다. 엄밀한 사실이 존재하는 수학과 과학의 영역에서도 그럴진대, 명확한 정답이 없는 인간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전문 자격을 갖춘 기록 관리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록물을 인증한다고 해도, 그것이 100%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로 내놓는 생성형 AI도 틀릴 수 있는 마당에, 고작 하나의 인간이 100% 옳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또,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편향(Bias)'을 가지고 있다. 어떤 관리사가 명백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기록물을 인증하더라도, 또 다른 관리사는 그와 상충되는 내용의 기록물을 인증할 수도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에 대해 서로 다른 판례가 존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완벽한 기록물'이라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면 모든 기록을 참고할 수 있는 개개인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명확하게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을 참조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건데, 서로 반대되는 인증 기록물이 있다면 판단에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흠... '실물 기록의 가치'가 높게 인정받는 세상을 상상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 스케일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듯한 기분이다. 그냥 '월드' 말고 하나의 '기관' 정도로 축소해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원래 배경 설정이란 원래 그렇다.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리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설정은 더 구체적이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배경의 완성도도 높아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허점이 발견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끝이 없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 된다. 물론, 원래 인간의 힘으로 "100% 완벽한 무언가"를 상상해내기는 불가능한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고로 우선 '페이퍼 펑크 사회'에 대한 상상은 여기까지 해두고 다른 주제로 넘어갈까 한다. 지난번에 뒤에 남겨두고 왔던 소재거리가 적지 않으니까.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또 불현듯 페이퍼 펑크 사회에서 쓸 수 있을만한 아이디어의 연결고리가 떠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Work Room _ 창작 작업 > 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정] '라인 펑크' 파고들기 -2- (0) | 2025.03.09 |
---|---|
[설정] '라인 펑크' 파고들기 -1- (1) | 2025.03.08 |
[설정] '페이퍼 펑크' 파고들기 -3- (0) | 2025.03.06 |
[설정] '페이퍼 펑크' 파고들기 -2- (0) | 2025.03.05 |
[설정] '페이퍼 펑크' 파고들기 -1- (1) | 202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