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ork Room _ 창작 작업/사회&문화

[설정] '페이퍼 펑크' 파고들기 -1-

728x90
반응형

'실물로 남은 기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상상해봤다.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지만, 이야기를 구상하기에는 제법 괜찮은 소재 같았다.
 
현대사회에서의 실물 기록은 단점투성이 구닥다리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반면 디지털 기록과 상반되는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문서들이 반드시 실물로 보존되는 경우도 있다. 즉, 현대사회는 분명 디지털 기록과 페이퍼 기록이 공존하는 사회다.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많이 보고 있는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실물 기록의 매력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디지털 기록이 더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페이퍼가 주류가 된 세상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페이퍼 펑크 - 1. 기록의 기술

페이퍼 펑크 사회를 배경으로 하려면, '모든 정보'의 기록과 전달에 실물 기록 매체가 사용된다. 여기서 '종이 기록 매체'가 아닌 '실물 기록 매체'라고 표현한 것은, 꼭 종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페이퍼(paper)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보통 종이를 의미하지만, 그 외에 물성을 가지고 있는 기록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종이 외에 다른 기록 수단을 쓰기도 했고, 종이는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기술의 발전 여부와 무관하게, 종이 외의 다른 기록 매체가 쓰여도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모름지기 단어란 널리 사용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는 법이기도 하고. 핵심은 '물성 매체를 사용한 기록' 그 자체다.

기록에 관한 기술이 발달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하나는 보다 진보된 인쇄 기술이다. 종이의 가공 기술이 발달하거나 기록이 가능한 물성 매체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면서, 문서나 출판물이 보다 효율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문물에 비유하자면 '책의 진화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하나는 손글씨의 발달이다. 손으로 쓰는 글씨는 사람에 따라 편차가 크기 때문에 '필적'이라는 이름으로 개성을 드러내거나 '증명'의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록 기술이 발달한 세계에서 손으로 대량의 기록을 할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벗어나려 애써본다면 손글씨를 기록 수단으로 쓰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물론 용도는 제한되겠지만.
 
페이퍼 기반의 기록이 주류를 이룰 때, 그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기술과 접목될 수 있다. '원본'이라는 개념의 존재, 그리고 각각의 기록물에 부여되는 '고유한 가치'라는 본질이 뒷받침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

 

페이퍼 펑크 - 2. 기록에 관한 사회구조

기술적인 발전에 관해서는 여러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게 접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원본이 손상되지 않게 하는 기술이라든가, 원본이 작성돼 '보관'이 필요해지는 순간부터 그것을 대신 보관할 수 있게 하는 특정한 문서고가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핵심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사회와는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요 직업군에서부터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면면이 등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문서 작성과 관리'에 대한 전문직이 생겨날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빗대자면 문서 작성 대리자 같은 개념이랄까. 혹은 정치 활동이나 기업의 의사 결정 과정을 기록하는 '서기'도 전문직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겠다. 현대에서 '속기사'가 전문직인 것처럼.
 
이밖에 방대한 양의 기록을 효율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기 위한 직업도 필요할 것이다. 사서 또는 문헌 관리인의 느낌이지만, 사회적 중요성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가 될 것이다. 문서 감식 전문가, 보안 전문가 등도 존재할 것이고, 파손된 문서 복원 전문가 등 기록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정확성과 보안성에 관한 전문직도 생겨날 것이다.
 
이들은 사실 물성 매체 기록을 바탕으로 세상이 존재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서화된 기록, 게다가 무분별한 복제가 불가능한 기록은 증명이나 증거로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사회적인 지위를 보장하거나 개인 간의 신뢰성을 담보할 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기록'과 관련된 직군을 좀 더 디테일하게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페이퍼 펑크 - 3. '기록 사회'의 장점

페이퍼 펑크 사회에서는 종이를 비롯한 물성 기록 매체가 문화의 중심에 있다. 이를 바탕으로 문학 작품, 편지, 일기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이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도 널리 활용될 것이다. 특히 손으로 쓰는 기록물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감성적인 면에서도 장점이 될 거라고 본다. (특히 요즘처럼 '감성이 메마른' 사회에서는 더욱.)
 
이밖에 물성 기록물은 '물리적 실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해킹이나 데이터 손실과 같은 위험이 적다. 실물의 내용을 그대로 기억하거나 통째로 복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원본 실물에 어떤 식으로든 접근해야 하므로 보안 면에서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다.
 
보관의 안정성 면에서도 우수하다. 현실에서도 종이는 상당히 안정성이 높은 매체로 꼽힌다. 또, 컴퓨터나 전자 기기의 사용법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빈 노트와 펜만 있으면 누구나 기록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또, 기록에는 '글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같은 비선형적인 수단도 있다. 지금은 타블렛이나 스마트 기기용 전자 펜 등의 도구가 널리 발달돼 있으니 옛날 이야기가 됐지만, 과거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기록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우스로 정교하거나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일러스트를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페이퍼 펑크 사회는 한층 더 장점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물론, 장점만 있을 수는 없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기록물의 단점을 토대로 '페이퍼 펑크 사회'의 쟁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어차피 현실이 아닌 이야기지만, '창작 세계의 배경'으로 쓰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개연성은 갖춰두어야 할 테니까.
 
 

이미지 출처 : 프리픽 (freepik.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