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펑크의 장점에 대해 쓰는 동안, "당연히 장점만 있을 수는 없다"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다만, "장점의 반대니까 단점"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접근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긴... 이 관점이면 애당초 '장점'이라는 표현도 애매하긴 하겠지만. 그건 이미 써버렸으니(?) 패스.
어떤 사회든 완전할 수는 없다. 한 시대에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체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오류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지금 시대에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라도, 어떤 조건이 맞으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본다. 게다가 어차피 상상 속의 세상이라면, 그런 최소한의 제약도 없지 않을까.
그런 고로 지금 떠오르는 이 생각들도 '페이퍼 펑크 사회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페이퍼 펑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련다. 혹은 '사회적 쟁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불현듯 떠오른 이 세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페이퍼 펑크 - 4. 실물 기록의 맹점들
실물 기록이 주를 이루는 사회의 맹점을 살펴보려면, 먼 옛날 과거를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손으로 모든 기록을 직접 쓰던 시대까지는 가지 말자. 그 부분은 이후에 해결책이 등장했으니까.
일단, 지난 포스트에서 썼던 '보안성'에 관한 쟁점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실물로 만들어진 기록은 오히려 보안성이 우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쇄 기술이 있으니 복제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클릭 몇 번으로도 복사할 수 있는 디지털 파일에 비하면 번거로운 것이 사실이니까.
다만, '완벽하게 안전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완벽한 안전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할 리는 없다. 다만, 완벽에 가까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조 시스템이 갖춰질 수는 있을 것이다. '정보를 지킨다'라는 측면에서는 지금 시대의 은행이라든가 개인 금고 같은 시스템만 있어도 가능할 테니까.
내가 구상한 페이퍼 펑크는 분명 실물 기록을 주류로 하는 사회지만, 그렇다고 디지털 기술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부분에는 활용하되, 주류가 되지는 않는 것에 가깝다. 그 편이 지금의 현대사회와 반대되는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로는, '인장'이나 '낙관'으로 보안성을 담보하는 시스템이 있겠다. 인장은 과거 서양에서 편지봉투를 뜨거운 밀랍으로 봉한 다음 그 위에 찍던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저렇게 허술한 봉인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인장에 새겨진 문양이나 패턴이 누군가를 증명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물론, 밀랍은 쉽게 떨어지긴 하지만, 한 번 뜯으면 똑같은 인장이 없는 한 다시 봉할 수 없다. '보안성'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본인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의 진위를 담보하기에는 괜찮은 시스템이다. 튼튼하게 지켜지는 문서 보관함에 개인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는 적절하지 않을까.
인장과 완벽하게 같은 시스템은 아니지만, 동양에서 서예나 미술 작품을 완성한 뒤 한 켠에 찍던 '낙관'도 비슷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의 복제는 가능하지만 낙관의 복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이 부분은 비교적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던 '인감 증명'과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가볍게 다루기에는 너무 생각할 게 많다. 추후 페이퍼 펑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구상하게 된다면 본격적으로 생각을 발전시켜보고 싶다.
페이퍼 펑크 - 5. 환경 문제
페이퍼 펑크 사회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종이'의 사용이 어마무시하게 증가할 것이다. 종이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나무를 원료로 써서 만든다. 재생용지가 아무리 확산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나무를 베는 일이 중단될 수는 없다. 환경 문제가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상상 속 세계에서 이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이 외의 다른 실물 기록 매체'를 구상하는 건 일도 아니다. 또한, 종이를 나무가 아닌 다른 재료를 써서 만든다는 설정을 넣기만 해도 해결된다. 따라서 '실질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환경 문제'라는 것이 왜 중요한 테마가 되는가? 그것은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의 디지털 기술 사회는 분명 편리하지만, 자연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자원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찌됐거나 환경 파괴가 초래되지만, 그를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이 크기 때문에 계속 진행된다. 결국, 끊이지 않는 대립의 원인이 된다.
이 부분에서 갈등의 여지를 남겨놓아야 풍성한 스토리가 가능해진다. 이리저리 소설이며 만화며 게임이며 즐기다 보니, "다양한 이해 관계를 지닌 개인과 집단의 충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갈등으로 빚어지는 긴장 상태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는 세계를 창조하면 이야깃거리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 문제는 '상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해결해서는 안 되는 문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한 기록 매체를 만든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의 환경 문제는 생길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뤄내는 창조 권능이 없는 한, 어떤 식으로든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얻게 될 테니까.
페이퍼 펑크 - 6. 새로운 기술과의 갈등
현실 사회에서 종이를 비롯한 실물 기록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밀려났다. 아직은 체감할 수 있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디지털 기술도 항거할 수 없는 대안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기술, 모든 사회의 필연적 숙명이라고 본다.
페이퍼 펑크 사회를 만든다고 해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종이로 된 기록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기술의 필요성을 주장할 것이다. 그것이 꼭 디지털화일 필요는 없다. 그저 실물 기록의 맹점을 만들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내세우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현재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물 기록의 장점에 주목하며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한 시대 내에 의견 차이로 불거질 수도 있다.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세대 간 갈등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갈등 포인트를 짚어내고 그려내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얼개와 방향, 디테일까지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환경 문제와 같다. 어떤 문제에서든 갈등이란 존재하게 마련이며, 그 자체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우습게도, 창작자는 갈등을 만들면 만들수록 행복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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