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판타지 습작을 해보면서 느꼈던 것은, '현실을 반영한다'라는 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냥 살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활용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해보면 그리 말처럼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포털에서 서비스하는 웹소설이나 웹툰 등의 댓글에서 '고증 오류'에 대한 이야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 소재, 혹은 특정 전문 분야를 다루는 작품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물론 고증은 중요하다. 다만, 창작물에서 철저한 고증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린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분량이 꽤 많을 듯하니, 따로 포스트를 마련해서 다루기로 하겠다.
아무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실 반영과 고증에 있어서 자유도가 제한된다는 것이 현대 판타지를 쓰면서 느낀 어려움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펑크 판타지'는 고증의 제약을 훨씬 덜 받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애당초 설정 자체가 '만약에(IF)'를 전제로 하는 장르니 말이다.
어제 썼던 글에서는 '아날로그 펑크'를 비롯해, '펑크 장르' 자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연장선으로, 현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요소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적어본다.
어딘가에는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는 들어본 적 없는 펑크 장르들이다. (그래서 이름도 마음대로 지었다) 단어 자체보다는 그 안에 담긴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기억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하드웨어 펑크 (Hardware punk)
지금 우리 시대는 명백히 '소프트웨어'가 중심인 시대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소프트웨어마저 '소유'한다기보다는 '공유'하는 개념이 더 강하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기존에 작성해둔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고, 소프트웨어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 이전을 소재로 한 펑크도 가능할 것 같다.)
그 덕분에 개인이 소유하는 하드웨어는 성능보다는 휴대성/이동성과 편의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 지점에서 'IF 루트'를 적용해본 것이 바로 '하드웨어 펑크'다.
글자 그대로, 하드웨어의 사양이 지속적으로 발달하는 시대다. "무슨 차이가 있냐"라고 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시대도 어쨌거나 하드웨어는 계속 발전을 이루고 있으니까. 하지만 '고사양의 하드웨어'를 필요로 하는 '개인'은 과거에 비해 분명 줄어들었다. 특정 산업이나 전문 분야에서의 수요는 여전히 많고 앞으로도 많겠지만.
하드웨어 펑크에서는 반도체 기반으로 극대화된 디바이스들이 중심을 이룬다. 컴퓨터와 전자기기 모두 '높은 스펙'을 추구하고, 스펙에 따라 개인이 체감할 수 있는 처리 능력도 명확하게 달라지고 당연히 가격도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기술적 전문성을 가진 컴퓨터 엔지니어들이 사회적으로 꾸준히 필요한 직종이 될 것이다. '더 우수한 성능의 하드웨어'를 개발하는 데 사회적 역량이 집중될 것이다. 다만, 물리적인 기술 발전 속도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전반적인 발전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느려질 거라 본다.
스펙(spec)이란 지극히 객관적인 개념이기에, 사람들은 보유한 하드웨어의 스펙으로 계층을 나누게 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다른 의미로 디스토피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2. 페이퍼 펑크 (Paper punk)
개인적으로 디지털로 기록이 대체된 것을 좋아한다. 파일로 저장해두면 종이에 비해 보관이 용이하다는 것도 있지만,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가 특히 좋다. 일정한 형태로 베이스를 구축해놓으면 '찾기'나 '검색' 같은 기능으로 보다 폭넓은 탐색이 가능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손으로 쓰는 작업의 감성은 쉽게 떨쳐낼 수가 없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쓰던 노트 필기는 분명 힘들었지만, 덕분에 꽤 많은 지식들이 '뇌의 기억'과 '손의 기억'으로 함께 남았다.
이런 생각에서 떠오른 것이 바로 '페이퍼 펑크'다. 디지털 형태의 데이터로 정보로 기록되고 공유되기 전, 모든 정보가 아날로그 매체에 기록되던 시대. 여기서 페이퍼는 아날로그적 매체의 상징적인 표현일 뿐, 꼭 종이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단, 이 아이디어는 이미 현실적으로 큼직한 단점이 드러나 있다. 관공서 등에서 실물로 데이터를 관리할 때 나타나는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규모의 한 분야에서만 해도 모든 데이터가 종이와 같은 실물 기록으로 쌓이면 얼마나 방대한 양이 되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몸서리를 칠 것이다.
페이퍼 펑크를 아이디어로 쓰고자 한다면 포인트는 명확하다. 기록 자체는 종이로 이루어지되, 그 '관리'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적 발전을 상상하면 된다. 페이퍼 펑크의 핵심은 '데이터의 기록과 저장이라는 행위 자체의 오리지널리티'다. 즉, 그것만 지켜진다면 기록물의 관리는 아날로그 외의 다른 방식이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써 보니 제법 괜찮은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으로 데이터를 적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무단 복제로 인한 문제는 훨씬 덜할 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좀 더 발전시켜보고 싶은 아이디어다.
3. 라인 펑크 (Line punk)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다. 스마트폰 이전의 피처폰 시대도 있었고, 그 전에는 시티폰, 삐삐와 같은 호출 기기도 있었다. (시티폰과 삐삐는 나도 써본 적이 없으니 자세히 묘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초창기의 통신은 무조건 '유선'이었다. 집집마다 있는 유선전화로 서로 소통하던 시절이 불과 30~40년 전이다. 지금이야 유선전화가 거의 대부분 인터넷 전화로 바뀌어서, 십중팔구 스팸 전화로 취급되는 시대지만.
여기서 착안한 것이 바로 '라인 펑크'다. 생각만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단어지만, 어차피 상상은 자유니까 한 번 생각해봤다.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의외로 인간을 괴롭히는 스트레스 요인이 상당히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유선 기반의 통신은 안정성과 품질이 높다.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보안 면에서도 훨씬 우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군대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통신반의 가설병들이 선을 들고 가서 연결하기만 하면 됐기에, 인프라 구축 자체도 무선 통신에 비하면 한결 간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
페이퍼 펑크 못지 않게 이 부분도 가상 세계 창작의 아이디어로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 엮어서 두 가지를 함께 쓸 수도 있을 것 같고. 물론 현대사회에는 너무도 당연해진 부분들에서 나름의 단점은 있겠지만 말이다.
한편, 라인 펑크 시대라면 자연스럽게 현대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취약해진다. 특별한 목적으로 핫라인 같은 것을 연결하지 않는다면, 상호간 소통이 크게 제약될 테니 말이다. 이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각각의 펑크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전개해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또, 그 과정에서 이 세 가지 말고 다른 아이디어도 발견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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