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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사회&문화

[생각] 펑크(punk)의 의미, '되새김질' 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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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잘 모르겠다.

 

과거 언젠가 '스팀펑크(Steampunk)'라는 단어에 꽂히듯이 매료됐었다. 아마 게임 쪽에서 일하던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게임업계를 떠난 뒤 스팀펑크라는 단어를 접할 기회는 사실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비교적 최근, 판타지 작품에 나왔던 어떤 개념에 관한 나무위키 문서를 읽게 됐는데, 본문 내 링크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스팀펑크라는 단어를 다시 보게 됐다. 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던지라 대체 어느 문서에서 그리로 넘어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이퍼링크 서핑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그때부터 홀리듯이 '펑크(punk)'라는 단어를 쫓아다녔고, 10개 가량의 포스트를 연이어 썼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멈춰서서 다시 생각해본다. '펑크'라는 단어를 이렇게 계속 붙여도 되는 걸까?

 

최근 읽었던 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완벽히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 말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펑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정보와, 지식과,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포스트 하나를 써보기로 한다. 아니, 대충 얼개를 짜보니 포스트 두 개 정도는 나올 것 같다.

 

펑크의 기원과 역사

본래 어떤 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원이나 기원, 유래, 역사 등을 짚고 넘어가는 편이다. 솔직히 '펑크'라는 용어의 기원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에 주로 관심이 있는 편이긴 하다. 그래도 구색(?)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으니, 기원과 역사에 대해 짤막하게는 정리해두려고 한다.

 

이 문단은 생성형 AI에게 요청해서 받은 것을 토대로 적었으니, 구태여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을 미리 전해둔다.

 

펑크(punk)라는 용어는 1970년대 음악 및 문화 운동에서 유래했다. 등장 초기에는 '반항' 그리고 '비주류'로 표상되는 하위문화였다. 즉 수많은 '서브컬처(Subculture)' 중 한 분야였다는 이야기다. (통계 조사 같은 것에 흔히 나오는 '기타 등등' 같은 포지션일 듯하다)

 

세상을 살아보니 느끼는 거지만, '주류 사회'는 종종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힘없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다. 서브컬처의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본다. 사회의 주류 문화와는 다른 무언가. 꼭 반대로 가는 청개구리 마인드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주류 문화와 '다른 것'이면 된다.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주류 문화에서 그어놓은 프레임이라는 것이 있더라.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펑크'가 지향하는 정신이자 태도다.

 

즉, 원래는 펑크 자체가 하나의 장르다. 여기에 스팀이니 디젤이니 사이버니 하는 단어들이 붙으면서 하위의 또 하위 장르를 만든 셈이다. 각기 다른 시대의 풍경, 그리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적 특징에 맞춰서 펑크가 지향하는 정신을 담아낸 것이다.

 

펑크 장르에서 주목하는 바는 언뜻 애매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뚜렷하다. '기술'과 '사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기술의 주체이자 객체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또,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 펑크 장르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기술, 그리고 사회비판

여기서부터는 내 의견을 바탕으로 한 내용을 적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펑크 장르의 공통점은 이 질문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던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판적 시각'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단점을 찾아내고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비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비난'이지 비판이 아니다.

 

비판이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 본질을 두고 있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달라진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이렇게 된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식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이 진정 의미있는 메시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 내용을 들은 누군가가 '그럴 듯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명확한 근거가 뒷받침돼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냉소적인 태도'가 적합할 수도 있다.

 

스팀펑크의 '스팀'은 알다시피 '증기'를 뜻한다. 증기기관, 즉 산업혁명 시대와 그 시기의 기술적 발전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산업혁명 시기는 소위 '기계'라 불리는 것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적용되던 때다. 여러 펑크 장르들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간의 산업은 대체로 '수공업'이었다. 반드시 인간의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어떤 생산물은 만들어낸 사람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생각과 같은 요소들이 모인 결집체였다. 결과물 자체가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표현해주는 셈이다.

 

기계가 도입되면서 인간의 노동력이 갖는 가치는 흔들렸다. 한 사람이 한 개의 물건을 만드는 동안, 기계는 수십, 수백 개의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기계는 인간보다 더 '유능'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인간의 노동력은, 그리고 인간 그 자체는 어떤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이런 심오한 질문 속에 '펑크'라는 장르가 지향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를 콘텐츠로 표현한다면, 그것이 '펑크 장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대안'을 던질 것인가

'대체역사'라 불리는 장르가 있다. 판타지 작품에서 흔히 등장하는 '평행세계'라는 개념도 있다. 사실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체역사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스토리를 그리고, 평행세계는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지로 갔을 때의 결과를 전개해가는 것이니까.

 

다만 '역사적 사건'이냐 '개인의 선택'이냐 라는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무래도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고, 개인의 선택은 기껏해야 당사자 혹은 주변 사람들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요인이니까. (개인의 선택에 따른 나비효과까지는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생각의 스케일이 너무 커지니까.)

 

즉, 핵심은 두 개념 모두 '다른 경로'를 탐구한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사실상 '펑크'도 비슷한 경향을 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라 변화한 인간의 삶. 이것은 찰리 채플린이 이야기했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에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크게 보면 '발전'이라 불리는 긍정적 면이 보이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로 인해 더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도 있을 테니까.

 

펑크 장르는 바로 그 부분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사회의 '발전'이라고 포장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 대신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고, 그 방법을 택했다면 이런 세상이 됐을 거라고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현실이 될 수도 있었지만, 선택을 받았더라도 꼭 그렇게 될 거라 장담할 수는 없는, '가능성의 세계' 내지는 '상상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발전이 반드시 모든 사람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역사 이래 가장 발전한 체제라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역시, 모든 사람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걸어온 시간선에 남겨진 모든 발자국은 '펑크'의 타깃이자 소재가 될 수 있다.

 

내용이 심오한지라 이미지도 난해한 걸로 넣어보았다. / 이미지 출처 : 뤼튼(wrtn)에서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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