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동안 이어가다가, 잠시 쉬어가는 느낌으로 저장된 글감 중 하나를 끄집어내보았다.
창조론(Creationism)과 진화론(Evolutionism)은 생명체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냥 '지적유희'에 불과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창작된 이야기, 특히 판타지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존재한다'라는 것은 매우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사실 판타지 작가라 해도 굳이 신경쓰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저 내가 깊은 생각을 즐겨 하고, 그 중 뭔가에 꽂히면 한없이 파고드는 성격이라 그런 거라 생각할 뿐.
너무 깊게 들어가는 건 잠시 보류해두고, 소설 속 배경 세계를 설정할 때 창조론과 진화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간략하게 짚어보는 글을 써볼까 한다. 내 스스로도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창조론 중심의 세계관
* 기본 설정
판타지 작품이라 하면 보편적으로 이쪽이 더 익숙하리라 여겨진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신(神, God)'이라는 존재가 바로 창조론의 대표적 개념으로 꼽히니까.
물론 판타지에 등장하는 모든 신이 '창조주'의 포지션인 것은 아니다. 신이 등장하지만 창조와는 거리가 먼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이라는 존재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무언가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설정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실제로 창조론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만물이 신의 의도 아래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정이 많다. 대지, 바다, 하늘 등 기본적인 자연 요소들마저 신이 만들었다는 설정이다. 실제 창조를 한 신은 오래 전 창조 작업을 마치고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거나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비롯한 지능종부터 동물, 식물, 각종 곤충이나 작은 생물까지. 모든 것이 신의 손길로 빚어졌다고 보는 것이 창조론의 기본 전제다. 각 생명체는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소명을 받았다는 설정이 붙기도 한다.
* 주요 요소
종족에 따라, 혹은 민족이나 부족에 따라 다양한 '신화' 또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굳이 다른 작품을 찾아볼 것도 없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화들이 그 예다. 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문화 콘텐츠 정도로 퍼지기도 하고, 그 긴 시간에도 색이 바래지 않고 종교적 기반으로서 자리를 다진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신에 대한 믿음을 어떤 식으로 공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종족 간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신들의 종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다른 종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서로 간의 차등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선민의식, 종족 우월주의 같은 것들이 모두 그 뿌리에서 뻗어나온 것들이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신에 필적하는 능력을 지닌 초월자'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설정에 따라 실제로 신이 등장인물로서 이야기에 출연하기도 하고, 단순히 인물들의 관념으로만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강력한 무력이나 빼어난 지략을 지닌 초월적 인물들이 등장하기 위한 토양으로는 아주 적합하다.
진화론 중심의 세계관
* 기본 설정
솔직히, 난 아직까지 '진화론'이라는 개념이 두드러지는 판타지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 작품을 많이 접하고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나무위키 검색에 빠져 지낼 때면 세상에 내가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 많은 중에 진화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진화론 세계관의 기본 설정'에 대해서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래서 늘 고민하던 것들만 좀 풀어놓아볼까 한다.
진화론을 근간으로 이야기를 쓴다면,
기존의 판타지 소설과는 어떤 부분에서 달라질 것인가?
지금 구상 중인 작품을 처음 시작하던 때에는 진화론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위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냥 신이라는 개념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은 채, 냅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되는 걸까? 현대의 인류가 그랬듯, 어느 순간 지적인 발달을 거듭하던 어느 종족의 누군가가 "생명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추적을 시작했다고 그리면 될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게 "이야기"로서 얼마나 재미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진화에 관련된 책은 여러 권 가지고 있고 좀 읽어보기도 했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로 소설을 구상하기엔 지식과 아이디어가 턱없이 부족하다.
* 주요 요소
만약 진화론적 세계관을 이야기로 그려낸다면, 무엇보다도 '진화의 증거'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것이다. 고대 생명체의 화석이라든가, 오래 전에 존재했던 문명 같은 것들 말이다. 현실과 똑같이 흘러가는 느낌이 들지만, 일종의 현대 판타지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긴 하다.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그 증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필요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Story)'를 쓰려는 것이지, 고고학이나 생물학 논픽션을 쓰려는 게 아니니까.
당장 생각나는 방법이라면, 집단과 집단 또는 세력과 세력의 갈등 포인트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 유적과 화석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해당 지역을 발굴하려는 인물이나 집단을 설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족이나 종족을 설정할 수 있다. 이들은 필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 될 것이다.
혹은 진화의 증거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파벌 간의 싸움으로 그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대립 또는 신념을 사이에 둔 암투처럼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로 치자면 정치를 배경으로 했던 <어셈블리> 같은 느낌이 되려나...
창조와 진화가 공존하는 세계관
* 기본 설정
좀 더 나아간다면, 두 가지 세계관이 공존하도록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진화론 일변도의 세계관보다는 더 익숙하다. 이런 세계관을 택한 작품은 분명 있다. 창조론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구분하기 헷갈릴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 두 가지 세계관이 혼재된 설정을 만들라고 한다면, 신이라는 존재가 창조의 흔적과 증거를 남겨놓되, 그 세계를 떠났다는 설정을 채택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이야기는 자료 형태로만 남고 실존하지는 않게 되니, 디테일한 설정을 만드는 데만 공을 들이면 되니까. (디테일한 설정 만드는 게 쉽진 않겠지만, 신이 존재하면서 계속 깽판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할 거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신이 만든 것은 초창기의 기본적 생명체 뿐이었고, 여기서 진화를 거듭하며 여러 종족으로 분화됐다는 식이다. 다만, 자연적인 진화에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진화 과정에서도 신이 적당히 개입하며 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 사라졌다고 설정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니, 창조론과 진화론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선택하면 오히려 쓸 수 있는 아이디어가 많을 듯하다.
* 주요 요소
이 세계관에서는 적어도 '신을 부정하는 세력'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존재했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면, 그것을 대놓고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의심하는 자들이야 있을 것이다. 음모론자는 어느 세계에서나 있는 법이니까.
다만, 신의 처사에 불만을 갖는 세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창조와 진화의 과정에 신이 개입했다면, 그로 인한 결과에 모든 종족이나 피조물들이 만족한다는 보장은 없다. "기왕 만들 거 이렇게 만들어주셨으면 좋지 않았겠냐"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거다. (원래 출시(?)한 뒤에 쏟아지는 소비자 리뷰(?)가 제일 무서운 법이다)
이런 의견 충돌은 자연스럽게 갈등 요소가 된다. 신의 창조를 인정하되, 그것을 받아들이는 신념까지 똑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서로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해와 통합의 과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드라마가 되지 않던가.
'Work Room _ 창작 작업 > 자연&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 '마법에 관한 의문'을 정리해보는 중 (0) | 2025.03.23 |
---|---|
[설정 참고] 마법의 속성별 '에너지 변환' 과정 -5- (0) | 2025.03.22 |
[설정 참고] 마법의 속성별 '에너지 변환' 과정 -4- (1) | 2025.03.21 |
[설정 참고] 마법의 속성별 '에너지 변환' 과정 -3- (0) | 2025.03.20 |
[설정 참고] 마법의 속성별 '에너지 변환' 과정 -2- (0)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