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확실하게 거절할 때가 되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한참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 나를 이브라힘이라 불러 주시오. ]
제 6장
그는 33살이 되었다.
그의 영어 실력은 약간 나아졌다.
아랍 억양 때문에 놀림당하는 일은 그나마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영어에 능숙해지기는 어려웠다.
언어에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만든 첫 도시는 나날이 성장했다.
누군가 메트로-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할 때쯤 이미 오천 명을 넘겼다.
섬 반대편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다 살아있다면 그보다 좀 더 많을 것이다.
기동률이 낮고 어설펐던 발전소는 이 도시의 전력을 공급하는 데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
덴버가 이끄는 과학자들이 화약을 이용해서 제법 훌륭한 대공포대를 건설했다.
목표를 정확하게 맞추지는 못했고 살상력도 약했지만 괴물들을 놀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시끄러운 허수아비 같은 거죠.
덴버는 효율이 뭔지 아는 친구였다.
발사하는 사람조차 큰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이제 갑작스러운 파괴와 죽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덴버가 죽으면 치명적이다.
덴버의 뇌에 들어있던 것들이 지난 십 년간 책으로 많이 옮겨졌지만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엘리야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60세가 다 되었고 이곳에서의 고생 때문에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가 저렇게 흥분해 있다는 건 그들의 당면 과제가 해결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엘리야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름을 찾았어. 조슈아. 네가 말한 대로야."
당연히 그가 말한 대로다.
이곳은 그가 만든 세상이니까.
필요한 건 찾아보면 다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우라늄도 찾지 않을까?
석유를 정제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걸 먹고 달릴 자동차를 만드는 데는 더 오래 걸리겠지.
겨울에 집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그보다는 덜 걸릴 것이다.
가장 복잡한 것들을 제외하면 기술들은 거의 남아있었다.
생명공학, 뇌 의학과 같은 고급 의학에 관한 연구들, 나노기술들은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 책을 들고 온 사람들도 없었을 뿐 아니라 당면 과제에 매여 우선순위가 낮아졌다.
언젠가 이 문명이 다시 그걸 연구하게 되는 때가 오겠지.
백 년 후일까.
아니면 천 년 후일까.
"기쁘지 않아, 조슈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그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기뻐요. 엘리야. 당연히 기쁘죠."
"그다지 기뻐하는 거 같지 않네.
이봐, 넌 너 자신을 너무 소모하고 있어.
좀 쉬기도 하고, 휴가도 다녀오고 그래."
"할 일이 많아요. 엘리야."
"넌 이미 충분히 했어.
이렇게 빨리 문명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눈을 감기 전 로마 단계면 충분하리라 봤지. 조슈아?"
"네?"
"좀 삶을 즐겨. 어차피 우리 세대에서 만들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설마 네 눈으로 뉴욕과 같은 대도시를 보려는 건 아닐 테지."
"뉴욕은 본 적도 없는 걸요."
꿈에서 보긴 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까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할 일이 많아요. 아이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에요.
자유연애가 잘 정착되고 있다면서요.
애들을 돌볼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해요.
질투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거에요.
치안을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네 말은 거의 맞아. 연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는 고수머리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허먼에게 좀 잘해주게나.
그녀는 자네를 좋아한다네.
게다가 예쁜 아이지 않나.
시 의회에서도 그녀를 하룻밤만이라도 안으려는 애들이 많다네."
"아빠. 하룻밤 안는 게 뭐에요?"
뒤따라 들어온 작은 엘리야가 물었다.
나이 든 엘리야가 이곳에서 얻은 아이였다.
이제 13살쯤 되었을 거 같았다.
엘리야의 이전 자식들은 물속에 죄다 잠겨있었다.
그 아이들 얘기가 나올 때면 엘리야는 무척 슬퍼했는데 그 역시 마음이 아팠다.
"넌 아직 몰라도 돼."
퉁명스럽게 보이도록 엘리야가 말했지만 어조에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이 아이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다.
꼬마가 빙긋 웃는 게 이미 대답을 알고 묻는 거 같았다.
머리가 좋은 만큼 장난기도 많은 녀석이었다.
"누굴 하룻밤 안는다구요?"
허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어린 엘리야는 뭔가를 들고 문간을 넘어오는 허먼에게 달려가서 포옥 안겼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짧은 머리가 누구누구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대량생산한 무명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광채를 더 빛나게 하고 있었다.
"누나, 누나. 이 아저씨들이 누나 얘기를 하고 있었어."
허먼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나이 든 엘리야는 기름을 찾았다니 어서 가봐야겠군 하면서 아이를 질질 끌고 나갔다.
뒤돌아보며 윙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 얘기 무슨 얘기?"
결국 그가 감당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일을 참 잘한다고."
겨우 대답을 찾았다.
"조슈아. 당신은 거짓말을 잘 못해.
얼굴이 빨개졌잖아.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그녀는 차갑기로 유명한 여자였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이거 마셔 봐."
그녀가 들고 온 나무통을 내밀었다.
그는 받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달다. 향이 짙다.
오래전에 마셨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꿀이다.
"꿀이네. 벌통이 잘 돌아갔나 봐."
"응. 그 아저씨들 잘 기억하고 있더라고.
꿀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다 마셔."
"웬일이야. 나한테 이런 것도 챙겨다 주고.
얼음공주께서."
"정력에 좋대."
그는 꿀물을 푸욱 하고 뱉어냈다.
"뭐야, 아깝게.
지금은 얼마 안 나온단 말이야."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조슈아."
"…"
"내게 아이를 줘. 당신만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진작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태였고 많은 남자가 달라붙어도 그녀는 초연했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만을 바라본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었다.
또 누군가 꿈을 꾸게 할 수는 없었다.
가족을 꾸리고 행복해져서는 안 됐다.
몇 번이나 그녀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그걸 무시했다.
그녀가 전략을 바꾸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이제 확실하게 거절할 때가 되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한참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아이만이라도 줄 수는 없어?
다들 그렇게 하잖아.
쉽게 자고 아이를 만들고.
그게 당신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거였잖아.
남들에겐 다 그렇게 얘기해놓고 왜 당신은 실천하지 않아?"
"이봐. 허먼. 다른 남자를 찾아봐. 난 할 일이 많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부탁할게."
그녀가 그녀답지 않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포기했다.
몸을 돌려 뛰어나가다가 들어오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이쿠, 아가씨. 조심하셔야지."
신부가 들어왔다.
뛰어나가는 허먼을 쳐다보았다.
"여자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신이 천벌을 내릴 거야."
천벌을 받을 거라면 진작 받았을 것이다.
16살 이후에 그는 어떤 신도 믿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신부가 슬퍼할 테니까.
"여기, 초안일세."
그는 황토색 종이 더미를 건넸다.
품질이 좋지 않은 종이 위에 작은 글씨가 빽뺵하게 씌어 있었다.
지금은 좋은 종이가 많이 나오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쉽지 않았다.
글씨를 작게 쓰시오.
그게 그때의 구호였고 노인은 습관을 잘 버리지 못한다.
"다 되었군요."
그들이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성경의 새로운 챕터였다.
열왕기서 다음 정도에 끼워넣으면 좋을 거 같았다.
후대의 사람들은 또 한 번의 신의 분노가 세상을 물에 담갔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헷갈리거나.
둘을 하나로 알거나.
그 어떤 거라도 상관없었다.
역사에서 그의 존재가 지워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