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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Game _ 게임 이야기/최강의군단(Herowarz)

[최강의군단] 반 미터의 아이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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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그거 말고. 

여기로 말이야.” 


입술에 손가락을 댄다. 


난 아주 아주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내어 말한다. 


“볼만 해." 




[ 반 미터의 아이 ]

2. 메트로시티, 이데아 군사훈련시설



“여긴 위험해. 뭐라도 배워서 여길 어서 나가” 

– 베니 포스터



복 입은 신사가 가져오는 시계에는 복잡하고 매우 비싼 시계라는 거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 

뒷면을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정삼각형과 그 안의 작은 인간의 눈 모양의 마크가 음각되어 있는 게 보인다. 


처음엔 시계를 제조한 브랜드이거나 공장일 거라 생각했는데 점점 시계의 종류를 배워가면서 어떤 곳도 그런 마크를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주인에게 조용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노인회 같은 거겠지. 

돈도 많고 나이도 많고 시계에 뭔가를 새겨 동질감을 느끼려는 거지. 

동창회 같은 거 일 수도 있고. 

학교 마크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겄냐…”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마크를 더 찾아보고 양복의 신사가 올 때 조심했어야 했다. 

그 신사에게 손바닥 크기의 회중시계를 수리해서 건네주다 떨어뜨린 게 발단이었다. 


시계가 돌 바닥에 떨어지면 각도에 따라 기스가 심하게 날 수 있어서 난 깜짝 놀라 얼른 주워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뒷면이 정확하게 바닥에 부딪쳐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그래도 꾸지람을 들을까 봐 주인을 한번 보고 신사를 봤는데 신사의 태도가 이상했다. 


시계를 살피기 보다 날 가만히 뜯어보고 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서 지팡이를 내 눈앞까지 올리더니 떨어뜨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큰일났다. 

신사가 눈치챘어. 


감색 양복 소매의 양 손이 내 반 미터 거리에 들어온다. 

박수를 친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신사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이더니 씩 웃는다. 
 

“너, 혹시 몽영이랑 아는 사이냐?” 
 

난 물론 그게 누군지 몰랐다. 


그 다음 날 시계방으로 몇 차례의 전화가 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인은 전화를 받으며 내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서 난 정든 시계방을 걸어나가야 했다. 
아직 고칠 시계들이 많은데. 


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과 너무 다른 건 좋지 않은 거야.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렴.’ 


신사에게 이끌려 차를 타고, 손이 묶이고, 눈에 안대를 하고 어디론가 오랫동안 먼 여행을 했다. 

차에서 내려 눈을 뜬 내가 처음 본 건 커다란 정삼각형 안에서 부릅뜬 그 눈이었다. 


그들은 이데아라고 했다. 

세상의 역사에 숨은 비밀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고고학 같은 건가요?’ 


라고 물었을 때 


‘뭐 그런 거랑 좀 위험한 일이랑 섞은 거라 할 수 있지.’ 


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위험한 일을 하는 건 확실해 보였는데, 그들이 나에게 시켰던 훈련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총을 쏴보게 했는데 혼자 쏠 때는 제법 괜찮았지만 다른 팀원들과 한두 번 모의 훈련을 해 보고 나서는 금방 관두게 했다. 


난 그들이 지시하는 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봐야 하는데 전투 중에 얼굴을 들이밀고 명령을 지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전기도 내 숨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치지직 어디 칙 왜 치직. 

그다음은 주먹으로 싸우는 거랑 컴뱃 나이프였는데 슬프게도 난 둘 다 미달이었다. 

“반응이 너무 늦는데?”
“소리를 못 들으니 당연하지. 

왜 이런 덜떨어진 녀석에게 이런 걸 가르쳐야 하는 거야?”


훈련 교관들이 서로 하는 말을 읽었다. 

그들은 - 날 데려온 신사를 포함해서 - 실망했고, 그러고는 더 이상 날 처음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시계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종이에 써서 보여줘 봤지만 


‘여길 몰래 떠나면 니 가족이 죽어.’ 


라는 엄청난 협박만 받고 돌아왔다. 

난 가족이 없지만, 이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욕을 먹어 가며 겨우 따라가야 하는 군사 훈련은 끔찍했지만 빈 시간에는 장애학교에서 그랬듯이 책을 찾아다녔다. 

이데아는 <히스토릭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대외활동[각주:1]을 했기 때문에 역사서가 많았고, 전쟁과 군사무기에 대한 책도 있었다.  
난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거기서 그 애를 봤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온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먼지가 가득한 책을 열고 기침을 하고 먼지를 털고 흐린 글자를 판독하고 또 다른 종이꾸러미를 찾아 열고 다녔다. 

그러다가 뭔가를 찾았을 때면 그대로 주저앉아 안경을 끼고 노트에 그걸 옮겨 적고 형광색 스티커를 붙여 표시하곤 했다. 


안경이 흘러 내리면 조그만 콧등에 머물러 있다가 연필을 쥔 손으로 안경을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코가 너무 작고 예뻐서 저 사이로 공기가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난 그녀를 볼 수 있는 방향이나 위치로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책을 읽다가 가끔 그 앨 보다가 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 때가 있었는데 그럼 그 애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렇게 대화를 읽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반 미터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래도 조금씩 진전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애의 가슴에 단 네모난 아크릴 판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야호. 


베니 포스터. 

견습 사서. 



도서관에서 그 애를 보기 위해 자리를 두 번 정도인가 바꿨을 때였는데,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깜짝 놀라 앞에 있는 책을 쥐고 읽는 척을 했는데 마침 글쓴이가 베니 포스터였다. 

제목은 <아라라트의 시작>, 창세기라 부르는 0년, 역사의 시작부터 등장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허먼과 곱슬머리의 엘리야가 초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허먼은 나도 알아. 

장애아 시설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시장의 위인전을 봤지. 

그러다가 어느새 그냥 쭉 읽게 되었는데 그녀의 글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객관적으로 쓰려고 하지만 그 안에 인물마다의 호오(好惡)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역사를 보는 시각에 따뜻한 감정이 있다. 

혹시 친해진다면 이걸 지적해야지. 

역사학자가 어느 쪽 편을 들면 안 되잖아? 


그렇게 혼자 웃으며 책장을 넘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는데 갈색 머리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화들짝 책을 덮고 보니 그녀가 어느새 앞에 앉아 있다. 

베니, 포스터. 

안경 너머로 날 물끄러미 보더니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한다.

 
“너 들을 수 있는 거 알아.”


난 깜짝 놀라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 

귀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친다. 

엄마의 기억이 머리에서 쏟아져 내려와 귀를 지나 가슴을 때린다.

 
“그거 내가 쓴 책인데. 

볼만 하니?”


의미 없이 책을 한번 보고 다시 그녀를 본다. 


“말할 줄도 알잖아. 

난 모르는 게 없어.”


난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겹쳐 수화를 만들려 한다. 

그녀는 그런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얘. 그거 말고. 

여기로 말이야.” 


입술에 손가락을 댄다. 


난 아주 아주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내어 말한다. 


“볼만 해." 


혀가 원하는 대로 잘 굴러가지 않는다. 


“어머, 볼만 하다고? 

너 왜 날 계속 따라다니니?”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좀 더 붉어진다. 


“나중에 내가 집필 중인 다른 책도 보여줄게. 

그건 볼만하지 않고 재미있을 거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입술이 웃고 있었는데 눈이 슬퍼 보인다. 


“네 기록을 몰래 봤어. 

너 이대로 훈련 계속 낙제면 몽영처럼 될 거야. 

이 중에서 뭐라도 찾아서 열심히 해 봐. 

어떻게든 여길 나가야 해."


그녀는 책 목록을 적은 쪽지를 하나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날 따라다니지는 마. 

난 위험해.”


그리고는 사라졌다. 

그 뒤로 난 그녀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훈련장에서 그녀가 알려준 책 중 하나를 펴들었다. 

탱크 조종술이나, 전투기나 헬기 조종술은 책을 열심히 봐서 공부를 할 수는 있었지만, 실제 연습할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군용 폭발물의 조립, 설치, 해체에 대한 책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준 목록의 맨 끝에서야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책은 총검술을 몇 가지 동작으로 그려서 설명한 내용이었다. 


칼은 부착하지 않고 소총만으로 1식부터 하나씩 혼자 따라 해 보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의 훈련장 어두운 구석에서 총검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냈다. 


차려 자세에서 앞에 총 자세로 쥘 때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횡으로 눕혀 두 손으로 잡고 개머리판으로 지를 때면 덜거덕 턱 하는 소리가 만들어진다. 

손과 총이 닿을 때, 그 세기와 방향에 따라 항상 다른 소리가 생긴다. 

난 그런 동작들에 매료되었다. 


몇 년 전 올리버 트위스트의 첫 장을 수화로 아이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한 줄의 문장도 한 마디의 단어도 틀리지 않았었다. 

손목시계를 열고 35개의 톱니 사이를 더 가느다란 드라이버가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총과 손은 소리 없는 춤을 추었다. 

찌르고, 돌리고, 막고, 후려치고. 


19개의 동작을 무한히 반복했다. 

순서대로 쭉 이어서 하는 게 절대로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 지자 이번엔 각 동작을 무작위로 섞어 움직여 보았다. 

어떤 건 잘 이어지고 어떤 건 잘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총검술 책을 더 찾아 보았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서로 다른 기술들을 갖고 있었다. 

찾을 수 있는 책만 해도 십 여 권이었다. 

말을 탄 기수가 내려치는 검에 대응하는 1차대전의 독일 총검술, 짧은 총검에 대응하는 오스트리아의 총검술, 근접 응용 동작이 대단히 많은 북한의 것들까지. 


난 어떤 총검술을 떠올려도 그 동작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1.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찾아 고증하고 연결합니다.> - 히스토릭 서비스의 모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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