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법을 몰랐다.
듣고 말할 수 있어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릴 수 있는 거야.
저들도 결국 나와 같아.
[ 반 미터의 아이 ]
1. 블랙시티 장애인 학교
“하지마, 때리지 마, 아프단 말야.”
–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지적 장애인 아이
내 세계는 항상 고요했다.
아침에 새가 우는 소리, 자명종이 따르릉거리는 소리, 위층의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비 오는 소리,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발걸음 소리, TV에서 나오는 아나운서의 말소리, 그 어떤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귀는 이상이 없었다.
손가락을 귓가에 대고 비벼 딱 하는 소리를 내 보면 왼쪽 귀도, 오른쪽 귀도 잘 동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혼잣말할 때 내 목소리는 잘 들린다.
얼굴을 긁거나 코를 비비거나 콧물을 훌쩍 삼키거나 쩝쩝거리는 것들도 잘 들린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멀리서 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닿지 않는다.’ 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내 몸에서 반 미터.
소리는 그 공간을 통과하지 못한다.
처음엔 청력이 약한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듣는 충분한 크기의 소리를 내 귀는 잘 못 듣는 걸 거라고.
목소리도 너무 작아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엄마는 그걸 알았던 게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식의 울음소리, 귀에 말했을 때의 반응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말을 했다.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입을 움직일 때마다 귀를 가까이 대서 불분명한 발음이 점차 나아지는 걸 확인했으리라.
아이였을 때, 엄마는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날 꼭 끌어안고 귀에 속삭이던 이야기의 내용은 잊었어도 그 장면과 느낌은 꿈을 꿀 정도로 또렷하다.
귓가를 스치는 긴 머리카락과 내가 뭔가 말할 때 입에 가져다 대던 둥근 귀의 말랑말랑한 느낌도 선명하다.
귓불에 점이 하나 있었고 어떻게 귓바퀴가 말려 있는지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냄새.
머리카락의 냄새.
피부의 냄새.
그 이후로 누군가와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어서일까.
지워지지 않는 감각들이 되었다.
그들은 블랙시티의 군인이었다.
아빠는 공왕류의 접근을 소리 대포로 밀어내는 포수였고 엄마는 목표물을 찾는 관측사였다.
나중에 기록으로 찾은 것들이지만, 스크림데이 1 때 누군가 실수로, 혹은 긴장한 신참이 대공포를 한 발 날렸고, 반수의 대공포들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발포를 해 버렸다.
이동 중이던 공왕류들은 신경질적으로 차례차례 내려와 제 3대공사단을 붕괴시켰다.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그 날 난 방 안에서 혼자 창문 밖을 바라보며 엄마가 돌아와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에 차가운 그녀의 볼을 대고
‘아이야 보고 싶었단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니.
어떤 책을 읽었니.
뭘 봤니.
어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니?’
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밖이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섯 살이던 난 불안하고 고요한 밤을 보냈고, 다음 날 문 앞에 나타난 군인들이 문을 두드렸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울어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도 내 울음소리는 듣지 못할 테니까.
‘넌 특별하단다.
앞으로 누군가 너에게 벙어리라는 말을 하겠지만, 혹은 귀머거리라고 놀릴지도 몰라.
그래도 슬퍼하지 말거라.
네 주위의 공기가, 네가 내뿜는 숨이 소리를 가로막는 거란다.
그들이 너에게 나쁜 말을 하면 그렇게 알도록 놔두려무나.
네가 특별하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할 필요는 없어.
너의 공간 안에 들어올 소중한 누군가만 알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사랑스런 내 아이야.’
알렉산드리아 2는 가난했지만 다행히도 다른 두 국가 - 메트로 3나 바빌론 4과는 달리 장애인들에 대한 시설이 잘 갖춰진 편이었다.
난 어머니가 예측했던 것처럼 장애 아동들을 위한 시설에서 키워졌다.
그곳에는 말을 못하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그 둘 다였고.
귀가 들리지 않으면 말을 잘 배우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선생님들은 산수와 글짓기를 가르치는 대신에 수화와 입술을 읽는 걸 가르쳤다.
난 금방 배웠다.
언어를 알고 배우는 것과 애초에 언어라는 개념부터 배우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게다가 아이들 중 반 정도는 정신지체이기도 했는데, 그런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어하곤 했다.
내가 이 시설을 나갈 때까지도 수화를 배우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난 그 아이들이 좋았다.
가끔 말썽을 부리거나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거나 말이 통하지 않아도 순수한 애들이었고, 그들이 혼나지 않도록, 얻어맞지 않도록 선생님들 몰래 조용히 시키거나 손을 잡아 주었다.
수화는 내 의사를 반 미터 너머로 전달하게 하는 목소리였고, 입술을 읽는 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 능력을 들키지 않고도 들을 수 있게 하는 유용한 기술이 되었다.
손이 언어를 그릴 때 들리는 미세한 부스럭거림과 스치는 소리가 좋았다.
항상 똑같은 강도의 소리와 똑같은 느낌의 소리를 만들고자 손동작을 아주 정확하게 반복하는 연습을 하곤 했다.
처음 시설에 들어왔을 때 선생님들은 날 정신지체로 분류했다.
말을 전혀 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소리를 들려줘도 전혀 고개를 돌리거나 눈 맞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수화를 가장 능숙하게 한다는 걸 선생님이 알게 되었다.
“이 애는 절대 틀리지 않아요.
동작이 빠르고 간결해요.
제가 좀 써야겠어요.”
난 수화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아이의 손 크기에 맞는 수화를 보여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입술을 읽는 것도 같이 가르치기 위해 입으로 말을 하면서 동시에 수화를 하는 걸 배웠는데 그날 바로 그걸 해버렸다.
당연히 원래 알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은 매우 놀랐고 내가 정신지체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더 맹한 아이처럼 보여야 했다.
선생님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한 아이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기에는 애들이 너무 많았고 선생님 수는 적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아이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관심에서 벗어났다.
장애아를 위한 학교에도 책은 있었다.
난 시야가 트이지 않는 곳에 숨어 책을 읽었다.
내 발소리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걸 듣지 못하기 때문에 책을 화들짝 닫으며 <전쟁의 역사>와 같은 책을 읽고 있는 걸 들키면 곤란했다.
혼자서 덧셈을, 구구단을 터득하고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가 힘을 더했다.
듣고 말하지 못해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책을 볼 때 주위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 큰 장점이 되었다.
책을 펴들고 첫 장을 넘기다가 정신이 들어 보면 몇 시간을 훌쩍 건너뛰는 일이 다반사였다.
글을 읽다 보면 글자가 점점 더 커지는 일이 잦았는데 이것도 내 또 다른 능력일까?
하는 의문을 갖곤 했다.
그렇게 난 옆에 있어도 들리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소년이 되었다.
누군가 말을 걸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척하면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다가 금방 관심을 돌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14살이 생일이 날 찾아왔고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심에서 장애아에게 주어지는 일의 폭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위한 안마시술소 같은 일이거나 수학 능력이 뛰어난 몇몇 지체아 5들이 갈 수 있는 연구시설 정도였다.
그 외에는 부유층들의 집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는 일들이 남았다.
다행히도 난 내가 잘할 수 있는 곳에 맡겨졌는데, 블랙시티의 초라한 시계방이었다.
정밀한 기계의 초침이 톡 톡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톱니바퀴와 나사가 만들어내는 세밀한 움직임에 금방 빠져들었다.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은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데 그건 내게는 어렵지 않은 수준이었다.
난 집중을 잘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어떤 소음도 날 방해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살아 있다면 내가 이렇게 조립한 시계를 채워 드릴 수도 있을 텐데…
일 년을 시계를 수리하면서 보냈다.
이따금 양복을 잘 차려입은 손님이 올 때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는 언제나 여러 개의 시계를 한꺼번에 맡기곤 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엄청 비싼 거다.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목이 날아갈 줄 알아.”
외눈 안경을 고쳐 잡으며 시계방 주인이 을러댔다.
“어차피 듣지도 못하겠지만.”
주인 역시 내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일을 잘 해내는 건 마음에 들어 했다.
시계방 주인에게는 시계가 인생이었다.
가족도 없고 오로지 하루 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는 게 낙이었다.
주인은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법을 몰랐다.
듣고 말할 수 있어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릴 수 있는 거야.
저들도 결국 나와 같아.
나 역시 친구가 없었다.
누군가 날 불러도, 난 듣지 못한다.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내 미래는 시계방 주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거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장애인이라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시계는 재밌으니까.
양복을 입은 손님이 맡긴 시계들은 특히 더 정교하고 재미있는 종류가 많았다.
앞과 뒤 모두 시계 창이 있는 것도 있었고, 분침과 시침 대신 작은 금속판의 인형이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들어올 때마다 마치 선물을 얻은 것처럼 시계방 주인과 나는 함께 즐거워했다.
문제도 있었다.
주인은 내가 시계를 들고 작업할 때마다 시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걱정했다.
망가뜨린 게 아닌가 하고 빼앗아 들면 소리가 들린다.
몇 번 그러다가 결국 내가 잘해 내는 걸 보고 간섭하는 일은 없어졌다.
뭔가 미심쩍게 생각하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일 년이 지나서 그건 큰 문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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