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그저
학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p.66
이번 달 초 즈음에 '놀면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공부나 학습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딱딱하고 꺼려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라프 코스터는 여기에 도전장을 던진다. '재미'와 '학습'을 같은 개념으로 본 것이다. 십수 년씩 주입식 교육에 시달려온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명제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돼 이 문장을 보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공감이 치밀어오른다.
이번 포스트는 재미와 학습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주제로 삼으려 한다.
[재미 이론] 놀면서 배우는 것의 중요성
아이들은 놀면서 엄청난 속도로 배운다. 아이들이 배운 내용은 너무나 작고 미묘하여, 그것을 배웠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p.22 한동안 공사다망했던지라 거의 2주 가까이 블로그를 쉬었다
skyzakard.tistory.com
재미는 학습의 다른 이름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반복'이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혹은 완전기억능력이라 불리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기존에 몰랐던 새로운 것을 단 한 번 보고서 완벽하게 학습할 수는 없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학습을 지루하게 만드는 요인 또한 반복이다. <재미 이론>에서 다뤘던 표현을 빌리자면, 뇌는 한 번이라도 접한 '패턴'에 대해 '루틴화'를 진행한다.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뇌에 자극을 주기 어렵다. 그 안에서 새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저 지루한 반복만을 요구할 뿐이다.
어떤 것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한다. 그중에는 가끔, 딱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뇌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것들도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1) 당시 상황을 연상할 수 있는 어떤 매개체가 있는 경우, 2) 별다른 매개체 없이도 당시 상황이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나는 경우다.
첫 번째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 경우는 확실히 '재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유로든 당시 그 순간이 '재미있었고', 그 결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다.
실제로, 그간 수많은 소설과 웹툰을 보고, 꽤 많은 게임을 플레이하며 무수히 많은 장면을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어떤 것들은 앞뒤 맥락 없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기도 한다.
이 명백한 이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미를 느낀 그 순간에, 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 (나도 모르는 사이) 장기적인 기억을 형성했다고 보는 것. 일반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설명으로는 가장 그럴듯하지 않을까.
'학습'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
앞에서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보자. 재미와 학습의 관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에는 '학습 = 지루한 것'이라는 공식이 고착화 돼있다.
<재미 이론>에서는 이에 대해 '전달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그 '잘못된 방식'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가르치려는 태도'다. 내가 가르침을 청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가르치려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좋게 봐줘도 '오지랖', 더 나쁘게 말하면 '꼰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업, 강의와 같이 일방향적인 정보 전달에 장기간 노출된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꺼려 한다. 아, 돈 내고 직접 신청해서 듣는 강연의 경우는 다르다. 이건 글자 그대로 '본인이 원하는 가르침'에 해당하니까.
이야기를 소비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재미 추구'다. 혹은 휴식과 함께 가볍게 즐기려는 목적도 있다. 어찌됐건 핵심은, 굳이 머리 아프게 공부할 목적으로 이야기를 소비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훈이나 깨달음을 전달하려 하게 되면, 독자들은 그 지점에서 흥미를 잃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불쾌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원하지 않는 가르침'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재미 이론>에서 말하는 바를 적용하면, 내용이 아닌 '전달 방식'을 바꿔야 한다. 같은 메시지가 있을 때, 그것을 명확한 문장으로 때려박는 것과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전자가 '원하지 않는 가르침'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에 가깝다. 독자로 하여금 성취감이나 자아효능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을 시작하기 위해, 또는 쓰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때때로 새로운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를 해야할 때가 있다. 그 과정에서 뭔가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면,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이야기에 녹여내고 싶은 충동이 앞선다.
그때마다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건다. 나조차도 방금 '배운' 새로운 패턴이다. 루틴화는커녕 소화시키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에 써먹으려는 건 몹시 성급한 짓이다. 소화하지 못한 것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고, 자칫하다가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이 아닌 오지랖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칠/배울 수 있는가
전달 방식이 더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아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즉, 게임이나 이야기와 같은 '재미를 추구하는 방식'을 활용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위에 링크했던 글에서도 다뤘듯, 어린이는 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놀면서 배우는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른이 돼서는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때때로 그것이 '인내'를 필요로 하는 방식이라도)
재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개념이 됐다. (개정판 도서가 나온 것도 2018년으로 벌써 7년여 전이다.)
비슷한 사례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의 <노는 만큼 성공한다>라는 책 역시 지난 2021년 또 한 번의 개정판이 출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초판은 무려 20여 년 전인 2005년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책들이 개정판으로도 출간될 정도라는 것은 노는 것, 즉 '재미'의 중요성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굳이 이런 학술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놀면서 뭔가를 새롭게 배우거나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본래 사람이 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노는 것'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능동적 활동'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앞서 '원하지 않는 가르침'에 반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반대로,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경우'에는 한결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기 쉽다. 이럴 때는 익숙해보였던 것도 새롭게 보일 수 있다. 이미 루틴화된 것에서 새로운 패턴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창의성(Creativity)'과도 연결할 수 있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일방향성을 탈피하기 어렵다.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거나, 그때그때 전개를 수정하며 방향을 잡아가는 경우는 어느 정도 상호작용성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방법이다. 작은 부분을 수정해나가다가, 자칫 전체 이야기 구조가 어그러질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기본으로 '떠먹여주고 싶은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적어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아닐 테니까.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스킬을 연마해야 한다. 이는 꼭 '열린 결말'이 아니더라도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기법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받아들이면 어떡하냐고? 글쎄… 1차적으로는 의도한 바를 전달하는 작가의 필력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아예 다른 답이 나온다. '원치 않는 가르침'을 피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본인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 하지 말고, 자연스레 해석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라. Let it be.
'Work Room _ 창작 작업 > 스토리텔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 이론] 틀과 알맹이, '재미의 본질'은 명확하다 (0) | 2025.06.29 |
---|---|
[고민] 꼭 진지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0) | 2025.06.28 |
[재미 이론] 3가지 딜레마,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0) | 2025.06.25 |
[재미 이론] 재미를 추구할 때의 3가지 딜레마 (0) | 2025.06.21 |
[재미 이론] 뇌의 본능, "새로운 자극을 주세요" (0) | 2025.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