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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스토리텔링

[고민] 꼭 진지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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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ing Image Creator

 

우리 주변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하다.
다만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p.70

 

 

글을 쓰다가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언급한 이후로, 자꾸 그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딴생각을 할 때면 아무 맥락 없이도 불쑥불쑥 끼어들곤 한다. 고풍스럽게(?) 표현해 '유희하는 인간'이라 하지만, 쉽게 말해 '노는 인간'이다.

 

'논다'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뉘앙스가 스며들어있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다. 아마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이른바 '백수'들을 가리켜 흔히 '놀고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지금 내가 '놀고 있는 입장이라 더욱 그럴지도.)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반항하듯 딴생각을 이어가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인간은 왜, 그리고 언제부터 '진지하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을까?

 

진지하게 사는 것의 명암

돌이켜보면 참 농담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이제와서 원인을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것이 있긴 하다. 가족 중에 딱히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족과 친척 외에는 잘 교류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는 것.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법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모두가 유머를 모른 채 사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주워들은 메타인지의 개념을 적용해, 나름대로 스스로를 객관화해본 결과, 나의 결정적인 문제는 나 자신의 태도에 있지 않았나 싶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나에게 늘 스트레스였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진지하게 받기 일쑤였고, 싸늘해진 분위기를 중화시키려 누군가 농담을 던져도 내가 나서서 그걸 쳐낸 적도 많았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꽉 막혀 있었던 셈이다.

 

물론, 진지하게 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속이 깊고 무게감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즐겁게 노는 자리에 초대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뭔가 일을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는 꽤 자주 불려다녔다.

 

그것도 괜찮았다. 나름대로 자존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다만 좀 아쉬웠다. 내가 원했던 내 삶은 순도 100%의 진지한 삶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삶도 아니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중간쯤에 서서 진지함 쪽으로 좀 더 기울어있는 모습이 딱 내가 원한 포지션이 아니었나 싶다.

 

애써 갖다붙여보자면, 게임과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것도 나름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임과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하니까, 이것들을 즐기다보면 재미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방향이 좀 틀렸었다는 답을 내렸지만.

 

다들 적당히 웃고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너무 무표정으로 살아온 게 아닐까 싶다 / 출처 : Bing Image Creator

 

꼭 진지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꽤 먹었다'라고 할 만한 나이가 됐다. 아마 어떤 사람에게는 '아저씨'라 불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나이일 것이다. 아저씨라는 단어는 이미 군대에서부터 숱하게 들어왔지만, 요즘은 그것과 별개로 '진짜 아저씨'라는 자각을 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지함의 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싶다는 바람이 강해진다. 너무 진지하게만 살아온 시간이 길었던 데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르겠다. 감히 자평하건대, 과거에 비해서는 진지함을 많이 덜어냈다. 아마 그렇게 바라며 살아온 것이 조금씩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에서, 내 이런 가려움을 긁어주는 구절을 발견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세상만사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시시한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어릴 적부터 여러 고민을 스스로 껴안은 채 살아왔다. 회고의 시선으로 봤을 때, 객관적으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진지하게, 더 나아가 '심각한' 수준까지 고민하며 살아왔었다.

 

그런 자기학대(?)를 통해서도 얻은 게 있긴 할테지만, 반대로 잃은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잃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데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없이 진지하게 살아온 시간 끝에, '덜 진지하게 살고 싶다'라는 욕망을 향해 살아온 시간이 꾸준히 쌓였다. 이제는 진지하게 살았던 시간과 거의 비슷해지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꼭 진지하게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흔들림 없이 "No"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다시 대답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아저씨가 될 거라면 '멋있는 아저씨'가 되고 싶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다 / 출처 : 영화 <아저씨> 스틸 컷

 

현실 모방, 진지함과 재미의 공존

'덜 진지하게 사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 핵심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덜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르다. 가벼워지는 것이 아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덜 무거워지는 것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또는 같은 방향으로 가되 조금 느리게 가는 것에 가깝다.

 

신체적으로 살이 쪄서 무거워진 거라면 식사와 운동을 바탕으로 가벼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영역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무겁고 진지하게 살았다고 해서 가벼움을 지향하다보면, 오히려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이 계통의 끝판왕이 바로 '나이를 X구멍으로 드신 분'이다.)

 

나는 이미 한 가지 방법을 찾았고, 얼마나 효과적인지 나 자신을 대상으로 테스트하는 중이다. 이 블로그의 주제로 삼고 있는 '이야기', 더 포괄적으로 나아가 '재미를 추구하는 모든 매체'다.

 

'진지하게 산다는 것의 명암'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첫 번째 파트에서 이야기했듯, 과거에는 '게임과 이야기를 즐기다보면 재미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즐기기만 하는 것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답에 다다를 수가 없다.

 

생각을 해봤어야 했다. 이것은 왜 재미있는가. 나는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또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가.

 

이야기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둘 중 하나라도 즐기는 사람을 꼽으면, 과장 좀 보태서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중에 과연 '이것이 왜 재미있는지'를 생각하며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맥락에서 흔히 등장하는 전설(?)의 그 짤 / 출처 : 원사운드 카툰 '호드 50'

 

과거의 나는 '재미있으면 그걸로 됐다'에서 끝났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논리적으로 좀 심한 비약이라는 걸 알지만,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진지함을 덜어내는 법'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젠 방향이 틀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딱히 근거는 없다. 적어도 십수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그 결과 예전보다는 좀 덜 진지한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으니까. '효율의 문제'는 있었을지라도,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는 의미다.

 

이야기를 비롯한 '재미 매체'들은 필히 어느 정도 현실을 모방하게 마련이다. 문득 떠오르기로, 이 현실 모방에 중요한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다음 글감을 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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