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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스토리텔링

[재미 이론] 재미를 추구할 때의 3가지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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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라는 목표
'재미'라는 목표로 가는 길은 복잡한 미로와도 같다 / 출처 : Bing Image Creator

 

게임은 부족과 과잉,
지나친 질서와 과도한 무질서,
침묵과 잡음이라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p.62

 

 

몇 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은 기본적으로 '게임'을 주제로 하는 책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다루는 입장에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구절이 많다. '게임' 대신 '이야기'로 치환해도 성립하는 문장도 무척 많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게임과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재미를 목표로 한다는 분명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저자 본인이 작가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을 할 것이다. 게임의 재미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함께 담아두고 쓴 듯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이번에 얻어 걸린(?) 글감은 '딜레마(Dilemma)'다. 재미 이론을 주제로 한 글은 물론, 그 이전에 썼던 '성격의 빅 파이브 이론'에 관한 글에서도 틈틈이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라든가 '줄타기가 필요하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강조한 바 있다. 이들을 묶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바로 딜레마가 아닐까.

 

 

[설정 참고] 성격의 빅 파이브 이론

원래 메모에 있었던 건 이거였다. 그런데 성격에 관해 쓰다가 MBTI를 한 번 언급했더니, 쓸말이 자꾸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어느새 그쪽으로 방향이 잡혀버렸다. 그래서 빅 파이브 이론에

skyzakard.tistory.com

 

재미의 매체 - 게임과 이야기의 비교

재미 이론에서는 게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표현을 소개한 바 있다. 그중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은, <문명> 시리즈의 제작자 시드 마이어가 제시한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라는 정의였다. 그가 만든 게임이 '턴 방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턴 방식이 아닌 게임에서도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쪽'을 선택하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야기에서도 동일하다고 본다. 이야기 역시 독자에게 계속해서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던져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결말까지 함께 하기를 바란다면, 전체적인 흐름 안에 흥미를 꾸준히 유지해줘야 한다.

 

물론, 방식은 다르다. 게임은 대표적인 '상호작용 매체(Interactive Media)'다.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능동적 방식을 취한다. 반면, 이야기는 작가라는 절대자(?)에 의해 모든 흐름이 설계돼 있고, 독자는 그것을 따라가는 수동적 방식이다. (물론 연재를 지속하며 독자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차이로 인해, 재미를 이끌어내는 방식도 달라진다. 게임의 경우, '선택(Choice)'에 방점을 둔다. 큰 틀에서 보자면 어떤 전략을 세울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승리 또는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선택지를 준다. 세세한 부분을 보자면 어떤 유닛을 생산할지, 어떤 능력을 업그레이드할지, 적을 어떤 경로로 공격할지 등을 선택하는 구조다.

 

반면, 이야기에서는 선택보다 '발견(Discovery)'에 집중한다. 어차피 모든 요소는 이미 작가에 의해 배치돼 있다. 훤히 드러나있는 요소도 있고, 소위 '복선'이라 불리는 숨겨진 요소도 있다. 역량이 뛰어난 작가라면, 전체적인 흐름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맥락을 풍성하게 해주는 디테일을 교묘하게 깔아놓기도 한다. 발견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재미 요소를 숨겨놓는 셈이다.

 

게임이나 이야기나, 뇌로 하여금 패턴을 인식하고 루틴으로 만든다는 대원칙은 같다. 새로운 자극을 접했을 때의 기대감, 그것을 알아갈 때의 즐거움, 마침내 익숙해졌을 때의 포만감, 그리고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이 낯선 방식으로 변주될 때의 흥미와 놀라움. 이런 것들이 재미를 이루는 대들보라고 생각한다.

 

게임과 이야기는 '재미'라는 공통 분모를 공유하는 관계다 / 출처 : Bing Image Creator

 

재미를 추구할 때의 3가지 딜레마

라프 코스터는 재미 이론을 통해 게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3가지 딜레마'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 글의 시작과 함께 제시했던 p.62의 인용구가 바로 그것이다. 게임 디자인의 딜레마라 하면 결국 재미와 연관된 것이다. 즉, 이는 이야기 창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딜레마 1. 부족과 과잉

가장 포괄적인,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주제다. 거의 모든 요소에 대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나 이야기 외에 영화, 드라마, 연극, 공연에도, 심지어 재미와는 무관한 다른 영역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명한 사자성어 '과유불급'과도 맞닿아 있다.

 

게임의 경우, 흔히 '콘텐츠 부족과 과잉' 문제에 시달린다.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에 비해, 플레이어들이 소비하는 시간은 턱없이 짧다. 이로 인해 보통은 콘텐츠 부족이 고질병처럼 따라다닌다. 비교적 드물지만 어떤 게임에서는 '콘텐츠 과잉' 문제도 발생한다. '미니 게임' 같은 형태로 기존의 콘텐츠를 살짝씩 바꿔서 대규모로 때려넣는 것이 그 예다.

 

이 딜레마를 이야기에 적용하면 어떨까? '이야기 전개와 관련된 사건이나 정보'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으면, 독자는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일 것이다. 사건이 너무 적으면 이야기의 개연성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위험이 크다.

 

반대로 너무 많아도 문제다. 인간의 뇌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까다롭고 복잡한 정보를 너무 연이어서 때려부으면, 독자는 '머리가 아프다'라고 느끼기 쉽다. '머리가 아플지라도 재미는 있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도 간혹 있지만, 나처럼 내공이 부족한 일반 작가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부족과 과잉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핵심은 '밀도'다. 정보와 사건을 제시함에 있어 '양(Quantity)'의 관점이 아닌 '질(Quality)'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정보, 굵직한 사건을 깔아놓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딜레마 2. 질서와 무질서

그럴듯한 제목을 달아놨지만, 실제로는 간단한 이야기다. 규칙(Rule)이 너무 엄격해도, 너무 느슨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단 몇 가지라도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비교적 이해가 쉬울 것이다. 너무 어렵거나 너무 쉬우면 둘 다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다만, 이 딜레마를 이야기로 가져오면 조금 달라진다. 이야기는 작가 → 독자로 향하는 일방향적 매체이기 때문에, 게임의 플레이어처럼 '지켜야 할 규칙'이 따로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질서와 무질서의 딜레마를 논할 수 있을까?

 

가장 대표적이면서 보편적인 항목은 '설정'일 것이다. 설정은 "이 이야기 안에서는 이렇게 하기로 한다"라고 사전에 정한 약속과 같다. 성격상 규칙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설정 붕괴'라는 표현은 작품에 가해지는 대표적 혹평 중 하나다. 사전에 정한 약속이 어떤 이유로든 깨지는 것이므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설정이 너무 촘촘하면 작가가 이야기를 쓰는 데 제약이 심하다. 읽는 입장에서도 설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이러면 흥미가 떨어지기 쉽다. 요즘처럼 '쉬운 글'이 잘 먹히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설정을 확 줄여버리면, 이야기의 기본 구조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따라서 이 또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딜레마가 된다.

 

딜레마 3. 침묵과 잡음

'불친절한 게임'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보통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튜토리얼(Tutorial)'이라는 것을 제공한다. 기본적인 조작법이나 게임이 진행되는 방식, 주의해야 할 사항 등을 알려주기 위한 콘텐츠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일종의 '연습게임'이라 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튜토리얼이 아예 제공되지 않거나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간혹 있다. 게임을 시작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 혹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가 빠져있어, 플레이어가 몸소 경험으로 알아내야 하는 경우를 가리켜 '불친절한 게임'이라 표현하곤 한다.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때로는 몰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조용히 있고 싶은데 계속 말을 거는 '과도한 친절' 또는 '오지랖'을 떠올리면 쉽다.

 

라프 코스터는 이 범주를 가리켜 '침묵과 잡음'이라 표현했다.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정보가 빈약하거나 없는 경우를 '침묵(Scilence)', 반대로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 경우를 '잡음(Noise)'이라 지칭한 것이다.

 

침묵과 잡음을 이야기에 접목하면 어떨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야기는 '불친절한 도입부'가 거의 필수라고 본다. 독자에게 제시되는 첫인상에서 흥미를 잡아끌 수 있어야 하니까.

 

"먼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마음씨 착한 흥부가 살았어요"와 같은 동화 스타일의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이야기의 도입부는 정보를 매우 제한적으로 던져주며, 독자가 스스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웹소설을 읽다보면 간혹 '친절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작가들이다. 대체로 친절함이란 권장되는 덕목이지만, 이야기에서는 아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박탈하고 틀 안에 가두는 작가, 과도하게 잡음을 섞는 작가를 가리키는 '설명충'이라 표현하는 이유다.

 

3가지로 간소화시켜 정리했지만, 실제로 딜레마를 일으키는 요소는 훨씬 많고 다양할 것이다 / 출처 : Bing Image Creator

 

다음 글에서는 위 세 가지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하나의 글에 다 쓰기에는 분량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다. 명쾌한 해답이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적어도 길을 잃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이정표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이 세 가지 외에도 작가들이 고민해야 하는 딜레마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 역시 이야기를 쓸 때마다 부딪치게 되는 고민거리들이 있다. 다만, 이야기 창작이 아닌 일반적인 글을 쓸 때는 잘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조만간 다시 집필을 시작하게 되면 떠올릴 수 있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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