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놀면서
엄청난 속도로 배운다.
아이들이 배운 내용은
너무나 작고 미묘하여,
그것을 배웠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p.22
한동안 공사다망했던지라 거의 2주 가까이 블로그를 쉬었다. 다행인 건, 그 사이에 책이라도 열심히 읽었다는 점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창작'이라는 행위에 관한 아이디어를 여럿 얻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인사이트들을 토대로 당분간 블로그를 꾸며볼까 한다.
놀면서 배울 때 빠른 이유
노는 건 즐겁다. "공부하자" 또는 "숙제해야지"라고 하면 발걸음이 묵직해지지만, "놀자"라고 하면 일단 도파민이 뿜어져 나온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노는지에 따라 이후의 반응은 달라지겠지만, '논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일이다. 안 즐거우면 방식을 바꾸든지 그만두면 되는 거니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보기야 자주 볼 것이다. 중요한 건 '집중해서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서 잘 노는 조카를 보면, 정말 '눈이 반짝인다' 싶을만큼 집중(몰입)한다.
무언가에 즐겁게 몰입할 때, 뇌에서는 '신나게 파티가 열린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뜻이다. 이는 '학습'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자리에 앉아 지루하게 반복해야 하는 공부나 숙제와 비교해보자. 신나게 놀면서 무언가를 학습하고자 한다면, 훨씬 효과적이고 기억도 오래 간다.
바로 '재미' 때문이다. 재미있으니 자꾸 해보고 싶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반복 학습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기존의 학습 방법이 무쓸모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학습하려는지에 따라 적절한 방식은 달라진다. 재미와 학습을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든 것을 놀면서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놀면서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라는 걸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예를 들면, 인형이나 레고 캐릭터를 가지고 역할극을 하면서 말하는 법, 감정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과거 아이들이 모여서 자주 하던 숨바꼭질은 '눈치와 전략'이라는 것을 익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오징어 게임> 덕분에 다시 유명해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마찬가지다.
블록 쌓다가 무너지면 다시 시도하는 끈기도 배우고. (와장창!)
창작물을 즐기는 것도 같은 원리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은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타깃으로 하는 책이다. 하지만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본질적으로 '작가'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이야기는 게임 뿐만 아니라 창작된 이야기, 더 나아가 글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소설, 더 나아가 '이야기(Story)'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다. 넓게 보면 이야기 또한 '놀이'의 한 분야다. 재미를 추구하는 매체이자 콘텐츠의 한 형태니까. 요즘은 '원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여러 가지 콘텐츠의 기본형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에 연결고리를 슬쩍 걸쳐본다. 재미를 추구하는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그동안 자주 인용했던 <독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내용을 또 한 번 써먹어야겠다.
'인풋(input)'의 4가지 목적 중 '유흥을 위한 인풋'이 있지만, 그 또한 온전히 유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공부를 목적으로 한 인풋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유흥을 위한 인풋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창작된 이야기에 재미있게 몰입하면서,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지, 그것이 현실에 얼마나 유용한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몰랐던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거나, 이야기를 마중물삼아 자그마한 깨달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
작고 미묘한 배움의 중요성
클만큼 커버린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 아이들의 놀이는 유치할 수밖에 없다. 음... 유치하다는 표현은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지니, '작은 것', '사소해보이는 것' 정도로 표현하도록 하자.
하지만, 사소해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삶 전반에 걸쳐 폭넓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놀이의 규칙을 정해놓고 지키는 것, 규칙 외의 상황을 마주했을 때 풀어내는 법, 양보하고 타협하는 법,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방법 등등.
이런 것들은 사실 대단하지도, 거창하지도 않다. 하지만 대단하고 거창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뿌리'가 될 수는 있다. 작은 것을 먼저 배우지 못하면, 큰 것을 배우기란 어렵다. 설령 배울 수 있더라도 뿌리가 흔들리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창작물에서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소설의 자그마한 설정 중, 몰랐던 내용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혹은 이야기를 읽다가 자신만의 어떤 아이디어가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당장 삶에 별달리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에 깊이 각인될 가능성이 높다. '재미'를 느끼던 와중에 습득한 것이니까.
그런 작은 것들이 삶의 어느 순간에 툭 튀어나와 도움을 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쌓아두면 다 도움이 된다'라는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재미를 느끼는 무언가라면, 그 사람의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창작자의 꿈을 꾸는 내게, 세상의 모든 지식이 호기심의 대상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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