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 클래식>이 정식으로 오픈 베타를 시작했다. 벌써 일주일 전 이야기다. 오픈 당일에는 일정이 있어서 서울에 다녀오느라 못했고, 월요일 퇴근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직업은 역시... 가슴이 시키는(?) '전사'다.
<바람의 나라>를 한창 즐기던 건 벌써 25년 정도 된 것 같다. 초등학생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중학생 때 학교 친구들과 바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도 내 첫 번째 캐릭터는 전사였다. 지금에 비하면 보안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던 시절, '계정'이라는 개념 없이 캐릭터 이름과 비밀번호를 직접 입력해 접속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시절의 감각이 살아있는 것 같다. 아이템과 마법의 자리를 바꾸는 단축키도 생각나고, 특정 부위 아이템을 벗는 단축키도 생각나더라. 이 게임 말고 다른 게임에서는 쓸일 자체가 없는 단축키라서 생소할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의외였던 포인트다.
잡다한 사설은 이 정도로만 해두고, 5~6일 정도 즐기면서 느낀 감정들을 소소하게 풀어내볼까 한다.
전사는 여전히 우울하다
20여 년 전에도 그랬지만, 전사는 늘 '솔플'이 힘든 직업이다. 다른 세 직업은 초반에 공격 마법을 배우기 때문에 비교적 레벨업이 수월하다. 솔플의 달인 주술사는 레벨 6부터 공격 마법을 배우니 말할 필요도 없고, 도사도 레벨 12에 배운다.
도적은 조금 늦긴 하지만 레벨 18이면 어쨌든 마법을 배운다. 이후로 도적은 밥줄이라 할 수 있는 투명+비영승보를 배울 때까지 마법을 통해 비교적 수월한 레벨업이 가능하다. 공격 마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기 레벨대에 맞는 사냥터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사는? 그런 거 없다. 장비가 탄탄하게 갖춰진다면 가능하겠지만, 상점 보급을 통해 살 수 있는 아이템은 '철도'가 한계다. 그마저도 힘 제한 때문에 레벨 30 정도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보다 성능이 좋은 아이템은 고레벨 유저를 통해 사야 한다. (내 레벨대에서는 습득이 불가하니까)
상점 보급 아이템만으로 무장했을 때, 전사가 자기 레벨대에 딱 맞는 곳에서 솔플로 사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셀프 회복 마법을 쓰면서 버틸 수는 있다. 마력 최대치가 낮기 때문에 술을 잔뜩 사들고 다녀야 하는 거야 도사를 제외하면 초반 어느 직업이라도 똑같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술값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클.바(옛 버전은 '클래식'을 빼고 그냥 '바람의 나라'라고 불러야 하지만, 예전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너무도 다른 관계로 혼동을 막기 위해 '클.바'로 명칭을 통일한다)에서는 몬스터에게서 돈이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전리품을 상점(푸줏간)에 팔아서 초반 재원을 마련한다. 그렇다고 해도 초반용 술값은 한 병에 10전 밖에 되지 않으므로 술 공급에는 지장이 없다.
문제는 효율성이다. 다른 마법 직업들은 술을 마셔가며 원거리에서 공격 마법을 쓰면서 사냥이 가능하다. 즉, 회복 마법을 쓸 일은 딱히 없다. (도적은 18레벨까지는 전사와 같은 신세긴 하지만, 그 이후에 편해진다는 점에서 함께 '마법 직업'으로 엮는다.)
전사는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깡으로 맞아가면서 회복 마법을 쓰면서 싸운다. 이번에 경험해본 바, 뱀굴 정도까지가 상점템으로 무난하게 솔플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뱀고기 드랍율이 좋으니 회복제로 먹으면서 싸우기도 했다. 난이도상 뱀굴 다음은 사슴굴과 곰굴이다. 모두 20레벨부터 40레벨까지를 적정 레벨이라고 '주장하는' 던전이다. 그러나 20레벨 전사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초반 돈 수급을 하기에 가장 좋은 던전은 돼지굴이다. 역시 20레벨부터 입장 가능하며 50레벨까지 이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노다지'다. 산돼지고기는 1개에 100전, 숲돼지고기는 1개에 200전씩 푸줏간에 팔 수 있다. 100개씩 채우면 1만, 2만씩 벌 수 있는 셈이다. 50레벨까지 돼지굴에서 잘 버티면 10만 단위 자본을 갖출 수 있다. (겨우 10만? 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클.바에서 10만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경험상 전사는 대략 30레벨 정도가 돼야 어느 정도 솔플이 가능하다. 그것도 둘러싸이면 곤란하고, 한두 마리씩 잡는 수준이다. 돼지굴은 몬스터들이 선제공격을 하는 던전이므로 까딱 잘못하다가는 황천행이다. (죽어서 아이템 떨어지는 일이 없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돼지굴은 시작에 불과하다
30~40레벨 구간은 상당히 힘들었지만, 다행히 사촌동생의 도움을 받아 빠른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40레벨에 착용 가능한 '현철중검'도 동생 덕분에 쉽게 구해서 바로 들 수 있었다. 아마 이마저도 힘든 사람이었다면 나보다 훨씬 더 암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돼지굴 솔플이 가능하게 된 시점부터 51레벨까지 악착같이 버티며 돈을 모았다. 대략 15만 정도 모아서 졸업했다. 51레벨이 되어 '들어가기에 창피합니다' 문구로 추방당한 뒤, 다음 행선지는 여우굴이었다. 최하급 몬스터인 흑여우나 백여우는 돼지굴과 엇비슷한 수준이라 문제가 없었다. 불여우만 조심하면 되는 수준.
물론 효율은 그리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 여우굴에서 드랍되는 여우모피는 1개에 20전이다. 돼지고기 모아 팔던 시절에 비하면 재미가 있을 수가 없다. 50레벨까지 효율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돼지굴에서 악착같이 버틴 건 돈 모으는 재미라도 있어서였는데... 여우굴은 그런 것도 없다.
게다가 더욱 암울한 건, 여우굴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이 매우 길어진다는 것이다. 애당초 여우굴은 30~45레벨까지가 적정 수준으로 돼 있다. 그 다음 사냥터인 자호굴은 40~60레벨이다. 그럼 나는 51레벨이니 자호굴을 가야 할까? 그랬다간 그냥 유령 신세다. 단 한 마리 때려잡는 데도 몇 분씩 걸린다.
그런 고로 전사의 암울한 삶은 이제부터가 T.O.P다. 자호 이후로는 사정이 좀 나아지냐고? 아니, 그 이후 사냥터는 사마귀/전갈굴, 인형굴 등이다. 자호굴에 비해 몇 배씩 경험치를 제공하는 사냥터인 만큼, 난이도는 급격하게 상승한다. 이 시기부터는 대놓고 '그룹 사냥(파티 플레이)'을 하라고 압박을 주는 셈이다.
옛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좋다. 그건 너무도 행복한 일이다. 마치 오래된 낡은 사진을 꺼냈는데, 사진 속 장면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그 시절의 감성을 되살리는 것이 그 시절의 콘텐츠를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성'을 해치지 않는 틀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안의 내용물은 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MMO는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스스로 까탈스럽고 유별난 사람임을 인정한다. 모르는 사람과 파티 플레이를 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조심스러워 한다. 원래부터 내성적인 성격인 탓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성적이어도 그룹 사냥을 잘만 하고 다니는 사람은 수두룩하니까. 그냥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이면서 극도로 위축된 거라고만 해두겠다.
아무튼, 그런 성향이다보니 다른 사람들과 수월하게 어울리지를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과거에 비해 나아졌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살고 있다. 이런 유별난 성격인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게임을 하지 말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간단하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듯, 게임을 즐기는 방식의 자유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MMORPG는 특히 그래야 한다. 솔플이 가능한 직업을 선택했으면 되지 않냐고? 솔플이 가능한 직업만을 강요하는 것부터가 선택권을 뺏거나 제한하는 일이라는 게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느린 건 괜찮다. 남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비효율적이어도 상관 없다. 나는 기어서라도 혼자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기를 원한다. 한때 오랫동안 즐겼던 WoW에 비유하자면, 광물이나 약초 채집을 통한 경험치만으로도 레벨업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레벨 60. 오픈 후 약 일주일. 실제 플레이한 날짜는 약 5일. 그마저도 퇴근 후 짬짬이 했고, 주말인 오늘 정도나 하루종일 플레이 했으니 속도 면에서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동생이 아이템을 공수해준 덕분이 크다. 이게 없었다면 아직도 40대 레벨에 머물러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클.바에서의 나는 현재 여우굴에 멈춰있다. 테스트해본 결과, 현재 상태로 자호굴 솔플은 안정성이 떨어져 너무 비효율적이다. 내 기준에서는 '불가능'이라고 본다. 2레벨을 더 올려서 '사중공격' 마법을 배운 뒤에 한 번 더 테스트해볼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까지는 여우굴에 머물러야 한다.
이제 오픈 베타 단계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안다. 20여 년 전 같은 게임을 즐기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에,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MO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대규모 멀티 플레이어'를 지향하는 온라인 게임이라면, 그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획일적으로, 한 가지 길만 강요하지 않기를 바란다.
솔로 플레이를 하면서 파티 플레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효율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혼자서 느릿하게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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