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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Record _ 일상 기록

공상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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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1일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글 전문


2007년 2학기 "인터넷 콘텐츠 기획론" 수업에 중간고사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스로도 많이 부족하다고 여긴 글이지만, 과분하게도 만점을 받았네요. ^^;;

지적받은 부분은 고치고 올립니다.





1. 외로움…… 그 곳에 앉아서 느끼다


 득 그런 날이 있지 않나요. 아침, 아니 대낮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 정도는 다 잊어버리고 쉬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이요. 주위를 둘러보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상에서 '하루'를 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언제나 제멋대로 자유로움을 즐기는 저와 같은 부류의 영혼들에게 일상의 할 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거든요.


 불은 펼쳐진 채, 옷들은 제각기 프리타임을 즐기고, 개수대엔 설거지감이 눈에 거슬릴 만큼 쌓여있는,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의 자취방 꼴을 본체만체하고 가방에 카메라와 메모장, 필기구 등을 챙겨 넣습니다. 그 와중에도 컴퓨터 본체 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화분을 햇빛 드는 창가에 내다놓는 것은 잊지 않네요.



 는 눈도 없을 텐데 남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세심하게 차려입은 옷이 제가 보기에도 영 거슬립니다. 혼자 툴툴거리기도 하고 구시렁대기도 하면서도 결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귀찮거든요…….


 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번 걸어봅니다. 대운동장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스탠드가 보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쪽에 있는 방향으로 가서 앉아봅니다. 시선은 농구를 하는 사람들 쪽에 두고,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시작합니다. "앉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스탠드. 사람들은 여기에 앉으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시 시선을 옮겨 스탠드 전체를 둘러봅니다.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진 나무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용케도 나뭇잎은 아직 무성하네요. 스탠드의 각진 곳을 채우고 있는 관상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억세게 보이는 식물이 유난히도 외롭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억센 모습 탓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 자신도 늘 혼자라는 암울한 생각을 종종 하는 탓인지 묘한 동질감을 갖게 되네요. 혼자만의 동질감 때문인지 그 자리에 오래 앉아있고 싶었지만, 관상수의 억센 잎이 말도 안 되는 걸로 엮지 말고 빨리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오늘 중에 돌아봐야 할 곳이 꽤나 많은 탓이랍니다.)


 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선 자리에서 몇 번 앵글을 잡아봅니다.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고질병인지 자꾸만 덜덜거리는 손가락이 꼭 매너모드로 해놓은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합니다. 심한 수전증 덕에 2~3번이면 끝날 촬영이 10번, 20번, 끝날 기미도 없이 계속 되네요.



 저히 깔끔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그나마 흔들림이 덜한 사진 몇 장을 건지고는 발걸음을 옮깁니다. 학교 둘레를 따라 돈다는 느낌으로 걷다보니 자연스레 '만인의 비상구' 쪽문 쪽으로 오게 됐네요. 대낮에도 우거진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는 쉼터로써의 기능을 하기에 적당해 보입니다. 학교도 그걸 아는지 여기에 넉넉한 수의 벤치를 설치해놓았네요. 이번에도 사진은 마지막에 찍을 요량으로 다짜고짜 벤치에 앉습니다. 빛을 가려주니 시원하긴 한데 동시에 이른 시간인데도 상당히 어둡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사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딱 적당한 장소입니다만, 잔뜩 폼 잡고 있을 때 이따금씩 쪽문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할 것 같네요.



 주 편안한 자세로 (흔히들 '쩍벌다리'라고 합니다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또 대책 없는 공상에 빠져듭니다. 4개의 벤치 중 제일 어두워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니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한 곳이더군요. 이곳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여기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조용한 쉼터겠지만, 여기 있는 벤치나 나무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외롭고 쓸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누군가가 다가와 앉아주길, 쉬어가주길 바라는 마음이랄까요. 심정을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이지만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제 일어나야겠네요. 가볼 곳이 또 있거든요.



2. 그리움…… 그 길을 걸으며 느끼다


 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벌써 하늘에 어둠이 엷게 깔리기 시작합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가는 증거인지, 무척이나 짧은 태양이 아쉽기만 하네요. 곳곳에 자리잡은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옵니다. 학군단 건물과 테니스장을 지나 스쿨버스 승강장에서 정석 도서관의 옆뜰 쪽으로 방향을 트니 잔디 곳곳에 작은 등 여러 개가 켜져 있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려다가 또 잔뜩 긴장한 손으로 셔터를 눌렀네요.


 빛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나간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돌아오는 길에 이 불빛을 보고 오라는 의미에서 매일같이 등불을 들고 서서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기다림보다 그리움이 더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네요. 불빛을 보자마자 곧장 떠오른 생각. 스스로 해놓고도 우스웠는지 미친 사람처럼 혼자 킥킥거리며 걸음을 옮깁니다.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저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사진을 찍다가, 핸드폰 문자판을 열심히 누르다가, 어느 순간 혼자 헤벌쭉 쪼개며, 또 고개를 내저으며 걷는…… 가만, 자판을 두드리면서 가만히 그때 모습을 떠올려보니 정말 '미친놈'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석을 지나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본관으로 향했습니다. 어느새 건물마다 불이 환히 밝혀져 있더군요. 문득 본관의 모습이 비치는 수면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꺼냅니다. '어둡습니다'라는 카메라 LCD 화면의 경고를 사뿐히 무시한 채 흔들리지 않은 컷이 나올 때까지 셔터를 눌렀습니다만, 결국 실패…… 저주받은 손을 원망하면서 잔디밭 경계석 위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금씩이지만 끊임없이 일렁이는 수면을 보며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어거지로 공상을 갖다 붙여봅니다. 그리운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흐르는 물은 적극적인 의미의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이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수면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면서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의심스러워서였는지 아니면 신기해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또 미친놈 취급당한 건 아닐지…… 하하하, 저란 놈 참 소심하기도 하네요.



 을 더 쳐다보다간 잠이 들어버릴까봐 얼른 자리를 옮겼습니다. 본관 2층으로 이어진 구름다리 밑에 놓인 벤치를 찾았습니다. 참 제게 많은 일이 있었던 곳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던 곳도, 고향에서 저를 보겠다고 올라왔던 친구와 싸웠을 때 화해를 했던 곳도 바로 여기였죠. 그런 만큼 제게 이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랍니다.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그때의 일들을 떠올려봅니다. 이젠 기억도 흐릿한 일들인데 아직도 그때가 그리운 걸 보면 지금 제가 참 만족스럽지 못하고 후회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봅니다. 그 아련한 그리움에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네요. 쪽팔리게……



 교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음을 알려주는 데는 저물어버린 해보다 훨씬 정확한 기준이죠. 4호관 모퉁이를 돌아 2호관 쪽으로 가는 길에 벤치들이 보이기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점점 어두워지는 게 신경이 쓰여서 재빨리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당연히 결과는 참패……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수풀에서 뭔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화들짝!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습죠. (뭐였지 그거…… 다람쥐일리는 없을 테고.) 벤치들이 온통 모래투성이여서 그 옆에 그나마 좀 깨끗한 벤치에 걸터앉았습니다. 어린애처럼 발을 땅에서 떼고 흔들흔들하며 의미 없는 시간만 죽이다가 심심해서 두 발을 위에서 찍어봤습니다.



 렇게 별 생각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기분 좋아지게 합니다. 그동안 늘 자유로움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쩌면 저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자유를 누리고 살면서도 자유를 그리워하는 모순을 범해왔던 게 아닌가 싶네요. 정말 어리석은 착각과 그리움으로 잃어버린 많은 시간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의 이름 속에 묶여버리겠지만, 그 시간들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제가 하기에 달린 일일 겁니다.



3. 공상…… 그 끝에 닿아서야 깨닫다


공상(空想)……


  막연한 주제 하나만을 가지고 시작했던 여행 아닌 여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반신반의했지만, 오늘 하루의 끝을 정말 후회하지 않을 만한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어렴풋한 만족감으로 소박하게나마 장식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 모두를 글로 써내기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도록 내버려둡니다.


 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여행이지만, 아무나 느낄 수는 없는 소중한 감상과 깨달음을 가지고 돌아온 하루. 오늘 저는 공상과 현실 사이를 여행하겠다는 참 공상다운 발상으로, 바깥으로의 여행 대신 제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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