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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스토리텔링

[고민] 너무 어려운 이야기, 너무 쉬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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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을 읽고 있다. 정확히는 '다시' 읽고 있다.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그 당시에는 인상적이면서도 꽤 어렵게 느껴졌던 걸로 기억한다. '몰입'이라는 개념에 관해 접근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나에게 딱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는 '어려움'과 '쉬움'의 경계에 관해 다루고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의 메인 디쉬는 '게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게임의 난이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라프 코스터는 "너무 어려운 게임도, 너무 쉬운 게임도 지루하다"라고 말한다. 너무 어려우면 포기해버리게 되고, 너무 쉬우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게 되니까.
 
나는 이것이 창작된 이야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본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어렵거나 심오하다. 반면 또 어떤 이야기는 한없이 가볍고 긴장감이 없다. 둘 다 문제가 있다. 이야기를 공부하려고 읽는 사람은 드물겠지만(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꼭 지식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라도 어떤 감흥을 줘야 하지 않겠나. 이런 관점이라면 나도 몇 마디쯤 얹을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의 문제점

천성적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즐거움을 목적으로 읽던 판타지 소설에서조차 그랬다. 몰랐던 개념이 나오면 검색을 해가며 이해하려 하고,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묘사가 나오면 메모를 하게 된다. 어느 대목에서 나로서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관점을 작가의 시선으로 보여줄 때면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런 작품만 일부러 골라서 보는 건 아니다. 미스터리 장르처럼 머리를 써야 하는 상황도 가끔은 즐긴다. 별 생각없이 그냥 즐길 수 있는 킬링타임용 작품도 종종 본다. 하루종일 머리를 많이 쓴 날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웹툰마저 '독서'라는 관점에서 본다.

 

그러다 보니 인문사회적 식견, 혹은 과학적 지식을 맛볼 수 있는 이야기가 좋았다. 또 그러면서도 나름의 '입맛'은 확고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는 좀처럼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영역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주 공간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막연해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 나이 먹도록 틈틈이 고민해봤지만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리저리 잡학다식을 꽤 많이 쌓았다고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내세울 만큼 특정 분야에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또, 잡학다식이라고는 해도 정말 단 한 분야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분야 내에서도 당연히 모르는 것이 있고.

 

괴상한 자존심 같은 게 있는 탓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이야기를 마주하면 금세 싫증을 낸다. 하긴... 특별한 건 아닐 것이다. 논문처럼 어렵게 쓰인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만한 식견이 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냥 취향이 독특한 ㅂㅌ든지.

가끔 내가 그런 ㅂㅌ가 될 때도 있긴 하다. 아주 가끔. / 출처 : Bing Image Creator

 

너무 쉬운 이야기의 문제점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 웹소설 플랫폼이 자리를 잡고, 너도나도 소설을 써서 올릴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그야말로 작품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누군가의 작품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주제, 플롯, 문체는 분명 있다. 아무리 인기가 많다고 한들, 그런 이야기들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정말 생각없이 뭔가를 읽고 싶을 때 한 번씩 들춰보다가 곧 덮어버리는(꺼 버리는) 정도랄까.

 

소위 '양판소'라는 말이 있다. 흔한 설정, 뻔한 인물, 훤히 예상되는 전개로 구성된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이게 '비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재미가 없다. 어차피 뻔한 고구마+사이다 구조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킬링타임용으로 집어들었다가 관성에 젖어 계속 보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높은 확률로 '티벳여우'의 표정으로 보게 된다.

 

그러다가 머지 않아 '하차' / 출처 : 나무위키

 

먼치킨인 주인공이 있는데,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시비를 걸거나 깽판을 치려다가 참교육 당하는 스토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사이다'가 필요한 날이 많은 요즘은 그런 이야기도 재미있을 때가 있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에는 영 재미가 없다.

 

이것이 아마 '너무 쉬운 이야기'의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읽는 이(듣는 이)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야 엄마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다지만, 그건 이야기 자체가 재밌어서라기보다는 엄마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교감하는 걸 즐기는 경우라고 본다.

 

반면, 성인들은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며 이야기를 읽는다. 내 가슴 속 명작이라면 다시 읽을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뒷이야기가 예상이 돼 버린다면, 그리고 그 예상이 자꾸 들어맞는다면, 그 '쉬운 이야기'를 굳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몰입할 수 있는 깊이'란?

라프 코스터는 '패턴'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어려움과 쉬움을 설명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패턴(pattern)이 맞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패턴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

 

하나의 게임을 즐기는 시간을 잘게 쪼개보면, 매번 어떤 패턴을 찾기 위해 선택을 하는 순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패턴을 찾는 과정은 너무 쉬워서 금방 끝날 수도, 너무 어려워서 도무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너무 쉬운 패턴 찾기는 몰입이 어렵다. 좀 몰입할라치면 금방 모든 패턴이 파악된다. 반면, 너무 어려운 패턴 찾기도 몰입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도무지 무슨 패턴인지 알 수가 없거나, 까마득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목과 바둑은 같은 도구로 하는 게임이지만, 그 깊이 면에서는 까마득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패턴'의 많고 적음과도 관계가 있다. / 출처 : Bing Image Creator

 

게임 이야기를 주로 하려던 게 아니니... 이쯤에서 글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한 마디로, 어렵고 쉽고의 문제는 비단 게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매체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소설도, 웹툰도, 영화도 모두 방식이 다를 뿐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수단이다. 사람들이 읽거나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그것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작품을 접하면서 몰입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뇌가 작품 속의 '패턴'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한다.

 

뇌가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패턴이라면, 몰입하는 건 어렵다. 반대로, 감도 잡지 못할 정도의 난해한 패턴이라도 몰입은 어렵다. 어느 정도는 알지만 모르는 것이 남아있는, 혹은 예상은 되지만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는. 딱 그 정도가 몰입을 위해 필요한 '선'이다. 그 줄타기가 한없이 어렵기에, 창작의 길이 쉽지 않은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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