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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스토리텔링

[생각] 진부함 깨기 - 고전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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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창작은 '진부함'과의 싸움이 아닐까 싶다. 소설과 웹툰을 즐겨보는 편인데, 제목만으로 이미 내용 예측이 가능한 것들이 많다. 그만큼 '진부한' 것들도 많다.

진부하다고 해서 100%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반대로 진부하지 않다고 해서 재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시간을 요구해야 하는 콘텐츠는, 결국 재미가 가장 중요하다.

다만, 내 취향일 뿐이다. 진부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쓰고 싶은 욕심이기도 하고. 물론 나에게만 진부하지 않을 뿐, 그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진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이에게 참신한 창작'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 정리했을 때, 다음 할 일이 생각났다. 기존 장르들의 '진부함'을 깨보는 것. 기존의 판타지 스토리에서 내가 진부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고 고민하는 글을 당분간 써볼까 한다. 몇 편이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계획 뿐이지만, 그 뒤에는 짚었던 진부함을 어떻게 비틀거나 깰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글을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히 빡센(?) 작업이 되겠지만.)

시작은 '고전 판타지'다. 고전 판타지는 판타지 장르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하위 장르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분명 판타지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명작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 판타지는 그 장르 자체가 진부해져버렸다. 장르의 특정 요소들이 반복되면서 예측가능한 범위가 많아져버린 탓이다. 고전 판타지가 진부해지는 이유들은 무엇이 있을까?

고전 판타지의 진부함 1. 클리셰의 남용

사실 클리셰는 고전 판타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고전 판타지는 역사가 길다. 그만큼 클리셰 요소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실제로 현재 연재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도 클리셰에 심하게 의존하는 것들이 분명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전형적인 영웅' 그리고 '영웅의 여정'이다.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영웅이 우연한 기회로 자각하게 된다는 스토리,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스토리다. 진부하긴 하지만 이건 그나마 좀 괜찮다. 어차피 시작점을 떠난 뒤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특정한 '마법적 아이템'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 비하인드 스토리도 흔하게 쓰이는 클리셰다. 고대의 유물이라든가 신탁을 받은 아이템 같은 것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기피하고 싶은 클리셰다. 이 아이템으로 인해 스토리가 갇혀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대립도 빼놓을 수 없다. 고전 판타지는 유독 '완벽한 선'과 '무한한 악'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악마나 마족, 마왕처럼 '악한 존재'로 못박은 경우가 흔하게 사용된다.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작품도 많아졌지만, 대부분은 클리셰처럼 '꺾어야 할 대상'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클리셰가 자주 반복되면 독자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전개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긴장감과 흥미를 감소시켜, '재미'라는 궁극적 목표를 퇴색시킨다. 전개가 진부해도 재미있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무척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고전 판타지의 진부함 2. 전형적 캐릭터

앞서 이야기한 '선과 악'을 좀 더 확장시킨 개념이다. 고전 판타지에는 특히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한다. 헌신적인 영웅, 그냥 끝없이 사악한 악당, 은둔하며 지내는 멘토,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조력자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캐릭터들은 오히려 '이건 고전 판타지'라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느낌이기도 하다. 캐릭터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읽는 입장에서 혼란스럽지 않다는 건 장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얘는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이겠지?'라는 식의 예측이 가능해진다. 음... 이건 장점 같기도 하고 단점 같기도 하다.

전형적인 캐릭터들은 보통 복잡한 내면이나 갈등 없이 단순한 구조로 설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간미'가 없다. 마치 주어진 성격대로 작동하는 안드로이드 같은 느낌이랄까.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는 데 허들이 된다. 주인공인데 독자의 공감을 살 수 없다면? ... 좋지 않다.

한편, 캐릭터들이 전형적일 경우, 그들 간의 갈등도 예측 가능해져 버린다. 예를 들면 헌신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영웅이 있다고 해보자. 그의 여정에 탐관오리형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이 있다면? 이미 어떤 스토리가 그려질지 예측이 된다.

물론 이런 스토리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 소위 '사이다'를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아주 적합하다. 예견된 스토리에 터지는 시원함은 때때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되니까.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갈등 구조가 반복된다면 이야기 전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장기 연재하는 웹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고전 판타지의 진부함 3. 세계관의 반복

고전 판타지 작품들은 대개 중세 유럽풍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봉건제를 모티브로 한 귀족 작위가 심심찮게 등장하며, 선천적 계급으로 핍박 받는 사람들처럼 뻔한 서사도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 입장에서 친숙하긴 하다. 동시에 진부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지만. 특히 소드마스터, 9클래스 마법사 등이 존재하는 유사 중세 사회는 많은 작품에서 거듭 반복되는 세계관이다.

솔직히 '마법적 아이템' 못지 않게 깨고 싶은 진부함이다. 그나마 둘을 비교하자면 이쪽이 낫긴 하다. 이쪽은 배경 설정이 진부할 뿐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하지만 마법적 아이템은 뭘 해도 그 아이템을 늘 반경 안에 두고 있어야 한다. 글로 다 설명하기 힘든... 그런 느낌이 있다.

유사한 세계관이 반복되면, 독자들은 이야기 자체 외에는 재미를 느낄 만한 게 없다. 그것만 있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우는 판타지도 '공부'의 수단으로 삼는다. 기존에 몰랐던 새로운 개념이나 문화적 요소를 보여주는 작품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유사 세계관의 반복이 그리 반갑지 않다.

게다가 이런 류의 세계관은 종종 '사회적 가치관'으로 인해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장 떠오르는 예를 하나 들자면, 여성을 낮추고 상품화하는 장면이 흔히 등장하는 것이다. 현대적 가치관을 가진 입장에서는 눈매를 좁히게 된다.

이건 좀 극단적인 예로 치더라도, 보통 고전 판타지 세계관을 채택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은 남성이 맡는 모습이 많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들러리가 되거나 잘해봐야 히로인 취급을 받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자칫하면 성별 대립 구도가 될 수 있으니 더 길게 쓰지는 않으련다.

이런 문제는 '비현실'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판타지는 본래 비현실이긴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굳이 그 말을 떠올리게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작가와 독자, 양쪽 모두에게 더 이득이다.

이미지 출처 : 프리픽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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