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국가들은 대놓고 싸우지 않는다. 뭐랄까... 웃는 표정으로 악수하면서 악력 싸움을 하는 느낌? 아니면 어깨동무하고 웃으며 서로 목과 어깨를 부숴버릴 듯 조이는 느낌이다. 아니면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든지.
판타지에서의 국가들은 보통 대놓고 싸운다. 전쟁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더라도, 여론전을 벌이거나 무역 제재,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며 기회가 있으면 국지도발을 벌이는 정도는 흔하다. '명분'만 있으면 언제든 전면전을 벌여 약소국을 발 아래 두려는 호전적 국가도 종종 등장한다.
정치 체제와 사회 구조는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사실상 함께 다뤄진다. 어떤 체제와 구조는 공존이 가능하지만, 또 어떤 것들은 사사건건 서로 충돌하고 대립각을 세운다.
이러한 대립은 사회의 안정성과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다양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긴장과 갈등은 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든다. 오늘의 주제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정치 체제와 사회 구조 사례들이다.
대립 구도 1.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제목이 좀 진부하긴 하다. 하지만 마땅한 다른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아 그냥 쓴다. 내용이라도 진부하지 않게 써보려 한다.
정치와 사회에서 주체는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권력층과 비권력층. 일반적으로 권력층은 왕족이나 귀족, 비권력층은 평민 이하 계급으로 본다. 보통의 판타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설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가 익숙하다. 현실에는 민주주의 국가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판타지에서는 어떤가? 겪어본 적도 없는 제국, 왕국이 더 익숙하다. 판타지에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떤가? 아무래도 낯설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며, 시민의 참여와 의견 수렴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익숙하게 봐왔던 판타지의 정치&사회 체제와는 상극이다. 일단 황제나 왕도 없고,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계급 구분도 없다.
이런 시스템은 판타지 단골인 제국과 왕국 등과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소수의 권력층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시스템, 비권력층에 대한 생사여탈권조차 자유로운 사회에서, 국민이 직접 권력을 선발하고 지켜보는 시스템을 어떻게 용납할까.
현대적 관점으로 본다면, 서로 다른 나라의 사정이니 상관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서로 교류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현실에서도 체제가 다른 국가들이 서로 데면데면하며 공존하는 사례는 있으니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지적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포인트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첫째. 판타지 세계는 일반적으로 좁다.
현실의 지구는 상당히 넓다. '지구 반대편'으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십수 시간을 가야 한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는 그 정도 규모로 구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보통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륙 몇 개로 구성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런 세계관에서는 국가도 몇 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라는 극단적 설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국가끼리라면 더욱 그렇다.
일반적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교류는 물적&인적 자원을 포함한다. 몇 안 되는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다보면, 특정 국가 사이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기는 어렵다. 그렇게 설정하면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잃게 되는 게 너무 많아진다.
이런 이유로 판타지에서는 서로 앙숙이면서 소소한 교류를 이어가는 국가들이 흔히 등장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딱 좋은 구도다.
둘째. 느슨한 교류만 유지할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좁은 대륙에서 서로를 적대하고 일절 교류를 하지 않으면 당사자들만 손해다. 이런 경우는 둘 사이를 중개하는 국가나 조직을 설정하는 방법도 있지만, 서로 '느슨한 교류'만 유지하는 방법도 있다.
즉, 사람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경제적인 부분에서 민간 중심으로 교류하도록 하고, 그 이상 정치&사회적으로는 냉전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창작된 가상의 세계 아닌가.
대립 구도 2. 엘리트주의와 평등주의
위 문단을 쓰다가 떠오른 또 하나의 대립 구도다. 민주주의 사회와 권위주의 사회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것 같지만, '엘리트'라는 단어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더라도, 그 안에는 필히 '사회 지도층'이 존재한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를 운영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른바 '엘리트'들의 존재로 인해, 국가&사회 내적으로도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다.
나는 권력이라는 걸 잡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작은 조직 안에서도 뭔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는 겪어봤다. 책임질 일이 많아서 피곤하기는 하지만, 권한이 있다는 건 확실히 특유의 '맛'이 있다. 한 번 겪어보면 내려놓고 싶지 않은 맛이라고밖에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권력도 결국은 비슷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겪어본 보잘 것 없는 권한보다 훨씬 큰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잡아봤던 사람들은 쉬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의 대립이 발생한다.
권력이란 결국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의지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다.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의 차이는 있지만, 권력은 본질은 같다. 하지만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의도, 의지대로 휘둘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깨달은 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엘리트 vs 비엘리트. 이 대립 구도는 너무 깊고도 방대하다. 고작 소제목 문단 하나, 포스팅 하나로 다루기에는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너무나도 많다. 이 공간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겉핥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에, 여기서 적당히 멈추는 게 차라리 나을 듯하다.
대립 구도 3. 전통 중시와 개혁 중시
보통 하루치 포스팅에서는 소제목을 3개씩만 고르려 하는 편이다. 한 포스팅이 너무 길어지면 '1일 1포스팅'이라는 목표를 이루기가 너무 버거워질 것 같아서다.
오늘 주제에 대한 마지막 세 번째 소제목을 두고 몇 가지 후보를 고민한 결과, '전통과 개혁'을 선택하기로 했다. 국가 간의 대립 구도를 만들기에도, 국가 내부에서의 대립 구도를 만들기에도 아주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핵심 요소는 '역사'다. 오랫동안 지켜온 관습과 문화를 중시하고 그대로 지켜가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역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건축이나 복식 등 유형의 것을 지켜가려는 이들도 있고, 특정 문화나 행사 같은 무형의 관습을 지키려는 경우도 있다.
반면, 이런 상황에는 흔히 개혁을 부르짖는 세력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새로운 세상에 맞춰 전통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는 주의다. 강경한 개혁파들의 경우, 전통을 아예 깨부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이런 대립 구도가 특히 정치와 연관될 경우, 엄청나게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어떤 양상을 보이든, 전통을 중시하는 쪽은 보통 '수구' 혹은 '보수'의 세력을 형성한다. 반대로 개혁을 중시하는 쪽은 보통 '진보' 혹은 '급진'의 세력을 형성한다.
전통과 개혁의 대립은 국가 단위로도 번질 수 있다. 가장 쉬운 예는 '오래된 제국'과 '신흥 강국'이다. 수백 년의 혈통을 이어온 제국과 그 체제를 부정하고 새롭게 일어난 민주국가라면 매우 좋은 대립 구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국가 체제부터 권력 구도까지 복합적인 대립이 이루어질 테니까.
갈등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성격상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싸움을 보면 심박이 빨라지며 신경이 날카로워지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까운 곳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괜찮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이라면 현실이 아니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첨예한 갈등으로 현실이 피곤한 탓인지, 요즘은 '힐링물'이 더 좋긴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야기에 갈등 요소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이야기로서 얼마나 생명력을 가질지는 불투명하다는 입장이다.
본래 성격의 한계 때문인지 극단적인 갈등을 그려내는 건 잘 못한다. 그래도 치열한 눈치싸움이라든가,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두뇌싸움은 써보고 싶긴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립 구도'라는 주제를 열심히 들이파봐야 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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