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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

[생각] '싸움' 외의 이야기들 - 정치, 경제, 두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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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의 주된 이야기 중 하나는 '싸움'이다. 강한 무력을 지닌 캐릭터는 대개 높은 인기를 누린다. 인성파탄인 '선천적 개XX'가 아닌 이상 말이다. 심지어 외모가 훌륭하면 개XX여도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리는 경우를 종종 봤지만, 그런 캐릭터도 보통 허약하고 찌질하면 인기가 없다. 아예 빌런으로 등장하거나.

즉, 판타지에서 인기를 결정하는 척도 중 하나는 '무력'이다. 누구나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고, 툭하면 싸움을 벌이며, 언제든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세계. 현실에서는 법이라는 테두리가 있어 실현할 수 없으니 가상의 세계에서 대리만족을 하는 건가 싶다.

호쾌한 전투를 벌여가는 이야기는 물론 흥미롭다. 강력한 인물이 수준 차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덤비는 상대를 참교육하는 스토리는 뻔하지만 즐겁다. 개차반 같은 상대일수록 더욱 그런 법이다. 특히 현실의 범주를 벗어난 초인적 능력을 앞세우는 싸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싸움 장면만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싸움 이야기만 주구장창 나오면 그건 그것대로 지겨울 것이다. 싸움이란 본래 가장 극단적인 갈등 해소 방법이다. 싸움이 발생했다면 그 이전에 치열한 의견 대립이나 관점의 차이와 같은 갈등 요소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싸움 외의 이야기 - 정치 싸움

'정치'라고 하면 유튜브나 TV에서 보는 익숙한 장면들을 떠올린다. '정치 혐오증'이라 말할 때의 정치는 그런 장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치는 범위가 넓다.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는 이상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는 논의와 조정, 합의와 같은 활동이 포함된다. 크든 작든 어떤 '집단'이 존재한다면 정치도 존재한다.

그렇다 보니, 정치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포함된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모든 행동도 본질적으로는 정치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모였을 때 더 강하다. 모이고 모이다 보면 때로는 실제 숫자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 흔히 '시너지'라 불리는 현상이 그렇다.

혼자서는 미약한 목소리였을지라도, 모이면 그 힘은 강해진다. 판타지에서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대립이 흔히 등장한다. 보통은 왕족이나 귀족 vs 평민의 구도로 그려진다. 척 봐도 미스매치일 수밖에 없는 이 싸움이 다채로운 스토리를 그려낼 수 있는 건, '압도적 다수'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권력에 의한 폭거에 대항하는 민중은 '정치 싸움'을 그려낼 수 있는 최적의 소재다. 진부한 소재이긴 하지만, 그려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다. 종족과 종족 간의 대립도 좋다. 국가 혹은 조직 내에서 정당이나 계파의 싸움도 정치 싸움의 대표 사례가 된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절대신에 대한 믿음과 그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립, 또는 서로 다른 신을 모시는 성직자들끼리의 의견 대립도 결국은 정치 싸움이다. 그야말로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전장'을 설정하느냐의 차이다.

싸움 외의 이야기 - 경제적 대립

한때는 이 주제를 무척 좋아했었다. 경제란 곧 돈이고, 어떤 세계에서든 돈이 넉넉해서 나쁠 것이 없다. 그만큼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지니까. 즉,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 모든 스토리를 '경제적 대립'이라 부를 수 있다. 돈이라는 '객관적 가치'로 승패를 매길 수 있기에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요즘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 대립'이라는 경쟁 구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말해야겠다. 단순히 누가 더 많은 금전적 이득을 보는지를 겨루는 스토리는 이제 영 시시하게, 혹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두 상단이 서로 대립한다. 이리저리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영업이나 로비를 펼친 끝에 한 상단은 100만 골드를 벌었다. 반면 다른 상단은 80만 골드를 벌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100만 골드가 이긴 게 맞다. 하지만 '이겼다'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반대로, 한쪽 상단이 모든 이권을 독점해 혼자서 200만 골드를 벌고, 다른 상단은 오히려 적자를 봤다고 해보자. 금액적으로 보면 크게 이긴 건 맞다. 하지만 재미있는 스토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너무 뻔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전개랄까.

경제적 대립은 분명 이야기로서 훌륭한 소재다. 다만, 그 대상이 '금전'이 아닌 '이득'이 돼야 비로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금전과 이득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결'이 비슷한 정도랄까. 금전은 확실히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한정적이다.

이득은 다르다. 비교하려면 비교할 수도 있지만, 인물의 관점과 시야, 가치관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객관적인 비교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정치 싸움과 겹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경제적 대립은 확실히 그만의 매력이 있다. 명확한 이익 집단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정치 싸움과는 또 다른 전개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싸움 외의 이야기 - 두뇌 싸움

이 글에 적은 세 가지 주제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두뇌 싸움이다. 창작자로서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탁월하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두뇌 싸움'이라 불릴 만한 판을 짜는 데 늘 한계를 느낀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난해하다. 머리가 좋은 창작자들은 그 복잡한 판을 잘 정리해서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복잡한 이야기를 누가 봐도 복잡하게 풀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학에서 어려운 책을 어렵게 설명하는 강의와 비교하면 적절하려나.

두뇌 싸움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힘을 앞세워 문제를 해결하는 통쾌함은 없지만, 실제로 잘 구성된 두뇌 싸움은 충분히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준다. 내가 자신없어 하는 영역이라 더 재미있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뇌 싸움은 개인 vs 개인, 개인 vs 집단, 집단 vs 집단 어떤 식으로든 구현할 수 있다. 물론 집단 대립이라 해도 결국은 특출난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오롯이 혼자서 헤쳐나가는 두뇌 싸움과 집단의 모사꾼으로서 움직이는 두뇌 싸움은 확실히 다른 매력이 있다.

흔히 '복선'이라 불리는 장치는 두뇌 싸움의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복선은 이야기 속 인물들끼리의 두뇌 싸움이면서, 동시에 작가와 독자 사이의 두뇌 싸움이기도 하니까. 일종의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같은 느낌이랄까. 나도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어야 할 텐데.

최근 다시 정주행 중인 한 작품이 떠오른다. 요즘 전개는 많이 아쉽지만, 한때는 정말 허를 찌르는 전개에 흥미진진함을 느꼈던 작품이었는데...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다시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이미지 출처 : 프리픽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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