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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Monologue_혼자 생각

[E.Fic.S] 존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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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당초 한 번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그 약속을 무효로 하기로 다시 '약속'하는 것 정도겠네요."
"왜 그렇게 된 거죠?"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다.
이 와중에 '왜'가 무슨 소용일까.
이유를 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무의미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성심껏 답해주었다.

"글쎄요. 어쩌면 약속의 가치가 너무도 하찮아진 세상에 대해 경고를 하고 싶었던 누군가의 의지는 아닐런지요?"
"약속의 가치..."
"누군가는 말로만 한 약속일지라도 철저하게 지킵니다. 또 누군가는 증거로 남겨지지 않은 약속은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죠.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약속의 내용을 교묘하게 피해서 이득을 취하려 하기도 합니다. 모두 다 '약속'이라는 본질은 같은데... 그것을 대하는 이의 마음가짐 때문에 가치가 달라지죠."

그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간다.
희미하게 웃는 표정.
무슨 의미일까.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약속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어딘가에 약속한 내용을 적고, 서로 서명을 하고, 보증을 하고... 그런 허례허식이 필요치 않아요. 약속을 하면 지켜야 하니까. 그게 당신들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겠죠."
"하지만... 지키지 못하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묘해진다.
여전히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웃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다.

"당신들 사이에서 말하는 '계약'은 어떤가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
"그건... 아니죠. 지키지 않으면 그에 따른 불이익을 받게 되니까."
"그 불이익은 누가 정합니까?"
"법으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고, 계약 자체에 명시하기도 합니다. 못 지킬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그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거죠."
"그렇군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무엇이 실수인 건지 알 수가 없다.

"감내하고도 살 수 있는 불이익이라면."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거군요?"
"그렇게 되겠죠. 뭐... 보통은 그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감내하기 쉽지 않은 불이익을 걸곤 하지만요."
"놀랍군요."

비꼬는 건가?
아니, 그의 표정으로 보건대, 결코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되물을 수가 없다.
그저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릴 뿐.

"존재율(存在律)이라는 게 있습니다. 아십니까?"
"낯설군요."
"그럴테죠. 우리에게나 통용되는 개념이니까."
"......"
"우리에게 있어 '감내할 수 있는 불이익'이란 없습니다. 약속을 어기는 순간, 존재 자체가 부정돼버리거든요."
"그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일단 약속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약속 자체를 잘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하더라도 매우 명확하게 하려 하고요."
"존재가 부정된다는 건... 죽음 같은 건가요?"

내 물음을 들은 그가 씁쓸하게 웃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글쎄요. 약속을 어겨본 일이 없으니 어떤 건지 알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

그는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처음 지었던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본능처럼 알게 되는 것이 있지 않던가요? 우리에게는 그런 본능 같은 거랍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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