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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Game/Herowarz

[최강의군단] 그 겨울, 눈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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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오랜 잠에서 깨어나면 동짓달이었다가 

다시 깨면 대보름이었다가 

다시 깨면 그 다음 해가 되어 있는 겝니다. 





[ 그 겨울, 눈 내리는 날 ]



당신들은 어찌 그런 이상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남사스럽게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치마를 입고 있다니 개탄할 노릇이로군요. 

어느 나라 양반이 이런 처자를 가만두는지요? 


거두절미하고 여기 이 초상화를 봐주십시오. 

이렇게 생긴 검객 나리를 혹시 본 적 없으십니까? 

하얗고 긴 머리카락에 몸은 어른이지만 아이 같은 성격에… 혹시?

못 보셨다고요.
그러하군요. 

아아. 이쪽도 아닌가 봅니다. 

도대체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꼬.

어떻게 날 도울 수 있단 말이십니까?

마야? 
서국의 왕입니까? 

그가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요. 


정말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일년 내내 눈이 내리게 해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너무 추울 거라고요? 

아, 제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 얘길 들어보시지요. 

두 해 전의 일입니다. 

제가 행상을 나갔다가 산을 구비 돌아내려 오는 길에 도적 떼를 만났습니다. 

가진 걸 다 내놓고도 온갖 고초를 겪을 뻔했는데, 다행히 그분께서 지나가다 그 장면을 보신 게지요. 


큰 싸움이 되었답니다. 

더 이상 절 괴롭힐 자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그분도 많이 다치셨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 그분은 더 이상 말도 잘하지 못했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이다. 


음식은 드시고 칼을 놀리는 방법을 잊지는 않으셨지만, 어른의 생각이 없으니 한 마리 짐승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몇 번이고 소저의 이름이 부여화라고 말씀드려도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셨습니다. 
  

다행히 저에겐 피리나 비녀 같은 걸 만드는 재주가 있지요. 

그분을 모시고 살림은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대에게도 어울리는 비녀를 하나 만들어 주도록 하지요. 

황금빛 긴 머리가 틀어 올려 꽂으면 아주 예쁘겠군요. 

그 후로 그분을 모시고 일 년 남짓 살았습니다. 

옷도 갈아입혀 드리고 다치면 상처도 어루만져 주고, 차차 정이 들게 되었지요.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가끔 멍하니 미소를 지을 때가 있는데 그게 참 좋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사랑은 아니었는데.
그렇게만 살았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어쩜 신기한 일이 일어나더이다.

지난해의 겨울 즈음이었는데, 몇 년 만의 폭설이 내렸지요. 

마당 자락에서 칼을 휘적거리던 분이 첫눈을 볼에 맞고 얼마 있지 않아서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절 보고 있던 초점 없던 눈이 뚜렷해지는 게 느껴지더군요. 
 똑바로 보시고 제 이름을 처음 불러 주셨습니다.


부여화? 


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살면서 그렇게 행복한 순간이 없었습니다. 

그날 오순도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부끄럽지만, 손을 잡고 눈 내리는 언덕을 뛰어오르기도 했지요. 

아… 그 겨울, 눈 내리는 날이 기억납니다.  

그 행복은 눈이 그치자마자 끝이 났습니다. 

눈이 오는 동안만 그분의 의식도 돌아왔던 겁니다. 

그 해 겨울은 하늘만 바라보며 살았던 거 같아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짦은 시간을 위해 항상 화장을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면서 내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분에게는 멈춰있는 시간에 이 소녀의 사랑만 더욱 커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사랑하는 속도가 다른 건 좋은 건 아니더이다.


봄이 되자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눈이 내리면 그분이 눈을 번쩍 뜨고 제 얼굴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만을 바라며 기다렸는데 

겨울은 훌쩍 가버렸지요. 

  

그분에게는 다만 잠깐의 시간뿐이었을 테니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오랜 잠에서 깨어나면 동짓달이었다가 다시 깨면 대보름이었다가 다시 깨면 그 다음 해가 되어 있는 겝니다. 
  

결국 전 사랑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겨울을 기다리며 다짐하고 다짐했답니다. 

다음 겨울 동안 그분의 마음에 꼭 들어서 꼭 사랑한다 말을 듣고 정혼도 올리려고 말이죠. 

맛있는 음식 재료도 모아놓고 저잣거리의 재미있는 얘기들도 많이 준비해 놨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는군요.

그런데

작년 겨울에는 눈이 오질 않았습니다. 

전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매일같이 눈이 오길 기다리며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습니다. 


봄이 다가올 즈음엔 매일을 술로 보냈답니다. 

제 속도 모르고 바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분이 정말 미웠거든요. 

이렇게 살다가는 속이 타서 죽겠구나.
내가 이 사람을 떠나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잠깐의 시간을 위해서 저의 꽃다운 나이를 세월에 흘려보내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지요.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짐을 싸고 저의 심정을 담은 글을 남겨 놓고…
둘이 지내던 오두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반나절을 쭉 걸어 저잣거리에 와 갈 때 즈음.
모든 게 다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요. 

하늘이 내린 벌이었을까요. 

글쎄 눈이 오는 겁니다. 
겨우 내내 한 번도 오지 않던 그 눈이 하필 늦삼월에 오는 겁니다. 


짐을 내던지고 신발이 벗겨져라 달려갔는데 그분은 벌써 떠나셨더군요. 
내 글에 대한 답을 적어 두고 말입니다.


'이해하오'


이 한마디뿐이었습니다.

그 후론 다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차라리 잘 된 일이야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뭔가를 미치도록 기다리면서 살지 않아도 되니까요. 


잔칫상에서 술도 실컷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도 봤습니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커져만 가더군요. 

그분이 말 못할 짐승이라도 좋으니 곁에만 있었더라면

그리고 겨울이 오고 첫눈이 내리던 날. 
저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이렇게 짐을 쌌습니다. 

그 후로 그분을 찾아서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랍니다. 

그대들도 이렇게 하얀 머리에 칼을 들고 다니는 분을 만나면 꼭 제 얘길 들려주십시오. 

이 여화가 너무나 그리워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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