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이야기의 디테일' 시리즈 3부작 그 두 번째 주제는 '감각'이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소였다. 장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전달하고 싶은 감각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감각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담아내기에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라는 게 좀 더 중요한 이유다.
또, '독자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다. 어떤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지라도, 단 몇 명이라도 그 장면을 읽으며 생생하게 떠올려주기를 원한다면 작가 입장에서는 쓰는 것이 맞다. 한편, 작가는 별 생각없이 쓴 장면이라도, 누군가 관심을 가질 수 있을만한 장면이라면 가급적 디테일하게 묘사해주는 것이 맞다. 뭐... 그런 장면을 어떻게 캐치해야 하는지는 별개 문제지만.
한 장면을 묘사하느라 너무 지지부진해지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그려내고 싶은 장면이라면 감각을 묘사하는 기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고로, 오늘은 감각의 묘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를 해볼까 한다.
감각의 디테일 - 시각
시각은 실제로도 인간의 감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각이다.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 중 약 70~80% 정도가 시각에 의한 정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기본적으로 눈으로 무언가 보는 행위가 가장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 또한 실제 인간의 감각으로 글을 대하게 마련이다. 즉, 글로 표현된 장면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 본능이다. 따라서 디테일을 담아내는 데 있어 시각적 묘사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라면 생김새다. 머리 스타일이나 색상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얼굴형이나 눈, 눈썹, 코, 귀, 입 등의 모양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 외에는 옷차림을 표현하는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들어간다면, 보통은 중요한 장면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야기에서 꽤 비중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는 인물이어야만 생김새 묘사가 의미 있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건물이나 사물이라면 형태나 색상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성벽이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다'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할 수도 있고, '벽난로에 두꺼운 장작이 잔뜩 쌓여 활활 타고 있었다'라고 좀 더 디테일한 장면에 포커스를 맞춰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보통은 그냥 'OO가 잡고 있는 손잡이가 가늘게 떨렸다'라고 쓴다면 분위기를 전하는 식의 묘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소매의 마감 처리가 꼼꼼하게 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고급 제품 같았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사물의 디테일을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도 쓸 수 있겠다.
풍경 묘사는 내가 좋아하는 영역 중 하나다. 이유라면 일단 기본적으로 '감성적·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라든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라는 식으로 인물의 심리와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감각답게, 시각 묘사는 활용방법이 무궁무진하다. 때로는 작가로서의 생각을 표현하는 용도로, 또 한편으로는 장면 전개의 완급을 조절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아무래도 '시각 묘사'만을 주제로 하는 글을 따로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감각의 디테일 - 청각
청각은 사실 감각 중에서는 다소 애매한 포지션이다. 정보 수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시각, 그리고 가장 예민한 것은 후각이다. 청각은 정보 수집량 측면에서도, 예민함 측면에서도 1위가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만큼은 청각이 시각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풍부한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냐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듣는 소리의 '종류'를 따져보면, 다른 감각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이야기다. 특히 말을 통해 듣게 되는 목소리는 사람마다 다양성이 있으므로 무수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원천이라 할 것이다.
그밖에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창문을 흔들 정도의 세찬 바람 소리, 음식점 앞을 지나가면서 듣게 되는 칼질 소리나 무언가를 볶는 소리 등등 청각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다양성은 때때로 시각보다도 풍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는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다. '정보량' 측면에서는 시각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글을 통해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감각이 중요하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소리를 묘사에 활용한다면, 장면을 표현하거나 분위기를 전달함에 있어서 훨씬 디테일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에 비해 청각은 좀 더 주관적인 면이 개입할 수 있다. 빨간색, 파란색 등으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시각적 묘사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 청각은 '쇠를 긁는 듯 몹시 거슬리는 소리'라든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단선율'이라는 식으로 주관적인 면이 들어갈 여지가 더 많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중요해진 과제는... 청각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경험과 어휘력을 더 늘리는 것이 되겠다. 블로그 글 쓰다가 모자란 점을 떠올리게 되는 걸 보니, 블로그 쓰기는 참 괜찮은 취미(?) 같다.
감각의 디테일 - 촉각, 후각, 미각, 공감각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나로 뭉뚱그려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딱히 이 감각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장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비중이 적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최근 읽었던 작품들 중 이 감각들을 비중 있게 다뤘던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내가 흘려보냈거나.
그래도 굳이 순서를 매겨보자면, 촉각 - 후각 - 미각 - 공감각 순이라고 하고 싶다. 물론 철저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덜 중요하다'라고 생각한 순서로 몇 마디씩 썰을 풀어보자면... 공감각이야 사실상 순수문학 계통의 소설이 아니라면 딱히 쓸 일이 없거나, 쓰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미각의 경우는 '요리'를 메인 소재로 하는 작품, 혹은 메인으로 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간단하게 한두 장면 정도나 활용할 정도라고 할까. 공감각이나 미각이나 작정하고 활용하면 기기묘묘하게 쓸 수 있긴 하겠지만, 일반적인 소설에서 그럴만한 장면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하다고 하는 감각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어떤 상황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자면, 처음 방문하는 마을에 들어선 주인공이 '뭔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고 묘사하는 장면. 혹은 배가 몹시 고픈 상태의 인물이 '맛있는 냄새'를 맡았다고 풀어가는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촉각의 경우는 좀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과장 좀 보태자면,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라는 입장이다.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는 '위기를 맞이한 주인공' 플롯이다.
가장 식상한 예로, 장비를 빼앗기고 어딘가 감금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 어두컴컴한 장소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갇혀 있는 상황이라면? 눈과 귀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 수월한 감각 도구는 촉각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손도 묶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촉각은 꼭 손이 아니어도 존재하는 감각이니 상관없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은 늘 즐겁고도 긴장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장면을 최대한 자세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즐거움이며,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이다. 앞으로 쓰는 모든 글에 있어, 감각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보다 꼼꼼하게 퇴고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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