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입체적 인물의 필요성 -2-
'입체적 인물'을 주제로 한 글이야 한 편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기본 속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가지치기를 잘 하는 인간인지라, 어느새 처음 잡아놓았던 뼈대에서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입체적 인물의 정의를 쓰고 나서, 너무 자연스럽게 '입체적 인물이 왜 매력적으로 여겨질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그러다가 또 은근슬쩍 '그럼 이야기 속 모든 인물들이 입체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으로 넘어가버렸다.
물론, 불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래 계획했던 주제들이 있었으니, 그에 대해서는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이다.
고로, 이번 포스트는 지난번 글에서 원래 쓰려고 했던, 놓쳐버렸던 맥락을 마저 완성하려고 한다. 중간에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도, 이번에는 뒤로 미뤄두고 원래 이야기하려던 주제를 마무리할 것이다.
4. 이야기에서 입체적 인물의 필요성
지난번 글을 마무리한 아이디어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입체적 인물은 어떤 스토리든 무조건 하나 이상은 필요하다는 것이 개인적 지론이다. 뭐... 작정하고 그렇게 쓰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이야기든 입체적 인물이 하나 이상 등장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단순한 전개 방식을 갖춘 플롯이 아닐수록, 서사적으로 깊이를 가진 작품일수록 입체적 인물의 중요성은 높아진다. 내적으로도 복잡한 갈등을 가진 인물들이 바깥 세상의 복잡한 갈등에 엮이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풍부해진다.
때로는 호쾌하게 상황을 해결하기도 하기만, 때로는 혼란스러워하거나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에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라는 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인물에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입체적 인물은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주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며, 작품과 독자 사이의 튼튼한 연결고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인물이 입체적이면 오히려 곤란해진다. 한편으로는 평면적 인물도 필요하다는 것이 굳건한 내 생각이다. 쉽게 말해, '마음 편하게 미워할 수 있는 인물' 혹은 '등장하기만 해도 꼴보기 싫은 인물'이 필요할 때도 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처절하게 몰락해서 독자에게 대리만족이라는 '사이다'를 선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혹은, '한없이 가벼운 성격의 인물'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문제로 고민에 빠진 주인공은 때때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부적절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이럴 때 가벼운 성격을 가진 동료가 가까이 있다면, 당장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5. 입체적 인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
그렇다면 입체적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가장 먼저, '심리적 갈등'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어떤 고민은 하루이틀 정도 시간을 들이면 쉽게 해결되는가 하면, 어떤 고민은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해결되지 않아 오랫동안 안고 살 수도 있다.
이야기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을 현실로 삼아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들 역시 내면에서 겪는 갈등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시시콜콜한 상황 하나하나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는 심리적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주인공이 어릴 적 국가 권력자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이후로 좋은 양육자를 만나 도덕을 중시하고 대체로 '올바르다'라고 이야기하는 가치관을 지니게 됐지만, 자신의 가족을 해친 권력자에 대해서도 올바른 가치관을 유지할 수 있을까? 굉장히 진부한 설정이지만, 이미 여기서도 심리적인 갈등은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심리적 갈등이 될만한 장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될수록, 독자는 그 인물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해당 인물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게 되는 갈림길을 하나둘씩 계속 던져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다양한 인간관계'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인물과 인물 사이의 상호작용은 반드시 서로 겹치게 된다. 때로는 평행선을 달릴 수도, 부딪치거나 얽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A라는 인물과 B라는 인물 모두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A와 B는 서로 앙숙 또는 라이벌이다.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둘 모두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하는 입장이라고 해보자. 이는 주인공에게는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상황이면서, 동시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이게 하는 대목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6. 입체적 인물을 위한 개연성
이와 함께 필요한 것이 '구체적인 배경과 환경'이다. 보통 어떤 작품에서든 '등장인물 소개'가 존재한다. 이는 해당 인물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인물의 성장 과정은 어땠는지, 지금 인물은 어떤 사회적 맥락에 있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설정집'이라는 형태로 직접 제공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달되기도 한다. 방법에 정답은 없다. 작가마다 선호하는 방법이 있고, 독자마다 더 좋아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입체적 인물이 되기 위해 '구체적인 설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줄거리 형태로 만들어진 인물 소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인물의 과거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담아낸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웹툰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과거 회상 장면'이다. 과거 회상으로 이야기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기는 것을 싫어하는 독자도 많다. 그것을 독자들에게 공개하든, 공개하지 않든 그건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반드시 '존재'하긴 해야 한다. 그래야만 입체적 인물의 갈등과 선택에 '개연성'이 생긴다.
이제 지난번 글의 2번 항목에서 살짝 언급했던 개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갈등에 시달리는 인물은 종종 '일관성이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자칫하면 '캐붕'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인물이 지금껏 보여왔던 행보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독자들의 야유를 받게 되는 현상이다.
이때 야유를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면,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제시돼야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전혀 딴판인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인물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게 된다. 주인공의 매력이 떨어지면, 바꿔 말하면 이야기 전체의 생명력이 꺼지는 것과 같다.
자, 그렇다면 개연성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 개연성을 위해 매 선택의 순간마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인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미리 인물의 배경 스토리를 설정해놓고, 그것을 평소에 조금씩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평상시 바른생활을 추구하던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는 것이 용납되려면, 그 전에 밑밥이 충분히 깔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리
지난번 글과 이번 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해볼 수 있겠다. 첫째. '입체적 인물'은 이야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그것이 꼭 주인공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가급적이면 주인공인 편이 좋다.
둘째. 입체적 인물과 평면적 인물이 적당히 섞여 있어야 한다. 독자는 바쁜 시간을 쪼개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며,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추리소설처럼 대놓고 머리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복잡한 인물과 단순한 인물이 적당히 섞여 있는 편이 좋다.
셋째. 입체적 인물을 구현할 때는 '디테일한 설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 전개에서 조금씩 녹여나가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생뚱맞은 짓을 한다'라는 평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