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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Room _ 창작 작업

[생각] 판타지 속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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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이어지는 법정 공방과 그에 관한 뉴스, 말 같지도 않은 억지를 지켜보며 '법치주의'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곤 한다. 이 나라의 법은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부족한가?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던져본 다음, 다시 내가 해야할 일로 돌아왔다.

아직 명확하게 구상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설정하고자 하는 세계에도 법치는 필요할 것이다. 제국이 될지, 왕국이 될지, 아니면 다른 어떤 국가 시스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규칙'은 필요할 것이다. 법치주의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판타지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초능력이나 마법과 같은 비현실적 능력들이 등장한다. 신화를 비롯한 초자연적 존재들도 등장한다. 일반적인 인간사회에 비하면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에서 법치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

법은 단순히 '지켜야 하는 규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다.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사용돼오지 않았을까 싶다.

가상의 세계인 판타지에서 법과 규범은 어떻게 형성될까? 이들은 등장인물과 이야기 속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번 글에서는 판타지 세계에서 법치주의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을 적어보려 한다. (역시 옛 자료 뒤적이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썰 푸는 게 재미있다.)

법치주의 기초와 사회적 역할

법치주의의 기본은 단순하다. "모든 개인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라는 것, 그리고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판타지 사회에서도 그 원칙은 다르지 않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법을 무시하거나 악용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다. 주인공이 활약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인 경우도 많다.

다만, 판타지의 법은 좀 더 복잡해지기 쉽다. 이 세계에는 인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여러 종족이 등장하기도 한다. 마법이나 주술 같은 초능력, 이능력을 사용하는 존재,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 능력을 가진 초월적 존재들도 흔히 등장한다.

이들을 아우르는 법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아니, 초월적 존재들을 인간의 법으로 규제한다는 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더 상위의 격을 지닌 초월자가 나서서 법이나 규칙을 내세워준다면 모를까. 판타지에서의 법치주의가 현실에서 법치주의와는 이질적인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에 비하면 국가마다 다른 법 체계 정도는 애교다. 당연히 제국의 법과 성국의 법은 다르다. 군대에서 '군법'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규정을 적용하는 것처럼, 성국에서는 종교에 기반한 규정이 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어쩌면 성국에서의 법은 신이 직접 개입해서 집행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법은 그 사회 내에서도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법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있을 때 그렇다. 하지만 또 법을 너무 명확하게 정해놓으면, 그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변수를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법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할 요소다. 권력자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거나, 강한 무력을 가진 존재가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라면 이야기는 극히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통쾌한 '사이다' 맛이야 있을지 몰라도, 이야기로서 생명력이 길지는 않을 거라 본다.

법치주의를 통한 갈등과 드라마

법치주의는 판타지 이야기에서도 갈등과 드라마를 창출하기에 알맞은 요소가 된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특정 세력에 의해 악용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앞에서 짧게나마 언급한 것처럼, 왕족이나 귀족이 법을 무시하거나 조작해 평민을 억압하거나 피해를 주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위와 같은 전개를 주인공이 풀어나가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단, 이 경우는 통쾌한 맛을 줄 수는 있지만 씁쓸함이 남는다. 명분이 없다는 이유일 수도 있고, 괜히 맥이 빠지는 전개가 될 수도 있다. 정교한 미로를 설계했는데 벽을 모조리 깨부수며 뚫고 가버리는 기분이랄까.

두 번째는 법의 틀 안에서 응징하는 방법이다. 명분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 방법을 쓰려면 상당히 까다로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설정상 법 체계가 촘촘하게 갖춰져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이 어느 정도 독자들에게 제시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제국법 0조 0항에 따르면 당신의 행동은 황제 폐하가 직접 내리신 칙령에 위배됩니다. 이런 경우 즉결처분이 가능하다는 건 아실 테고... 이런, 마침 제게 폐하께서 내리신 즉결처분권도 있네요?"라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다간 판타지가 아니라 법정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적당한 짬뽕이다. 주인공의 무력으로 밀어붙이되, 법에 명시되지 않은 편법을 적당히 이용하는 식이다. 법 조항을 이용하는 건 두 번째 방법과 비슷하지만, 보다 덜 구체적이어도 넘어갈 수 있다. 이 경우는 법정 드라마보다는 추리나 미스테리 느낌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법정 드라마라고 해도 진지하고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적절히 사용해 또 다른 흥미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마법을 통해 완전범죄를 깨뜨릴 증거를 수집해 제시한다거나, 신비로운 존재가 증인으로 등장해 반전을 제공하는 형태가 될 수 있겠다.

결국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이의 역량에 달린 일이다. 법치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속 세계의 개연성과 당위성을 만들어주기 위한 요소다. 하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몰입을 불러올 수 있는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서의 법치주의의 한계

판타지 세계에서 법치주의는 분명한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실제 이야기에서 다뤄지든 다뤄지지 않든, 설정은 디테일하게 해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보니, 이런 한계들을 피해가기가 어렵다.

첫째, 세계관 설정이 복잡하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각종 초능력이나 이능력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법치주의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변칙이 필요해진다. 가장 간단한 예로, 마법을 통제하는 구속장비나 감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은 언제든지 법치를 피해갈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법 자체가 완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이질적인 세계에서는 '법대로 다스린다'라든가 '법을 집행한다'라는 개념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모든 인물들이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을 갖는다면 또 모를 일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둘째, 개인의 힘이 법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판타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강력한 마법사, 기사 등은 사실 일반적인 법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법의 강제력보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이 갖는 권위를 무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법은 들러리 신세가 된다. '힘이 있으면 장땡'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드러낼 우려도 있다.

이 한계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로 귀결된다. 앞에서처럼 모든 능력자들이 법을 자발적으로 준수한다는 것은 비현실적 설정이 되니, '더 큰 강제력'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똑같이 뛰어난 무력을 갖춘 사법기관, 집행기관이 존재하는 방법, 또는 신적인 존재에 의해 자동으로 집행되는 법치 시스템도 괜찮은 아이디어일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보통 '극적인 전개'를 띤다. 스토리 호흡이 빠르거나 대규모의 군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흔하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법이라는 개념이 이야기의 맥을 끊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급박하게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상황에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다는 이유로 사법기관이 추적해와 주인공을 잡아간다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치의 이상은 실현했지만, 주인공의 이야기에는 브레이크가 걸리는 셈이 된다.

읽는 입장에서는 어떨까. "이 세계는 현실과 다르게 법치가 살아있네~"라며 흐뭇해할까? 글쎄... 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다. 액션과 모험을 중시하는 스토리라면, 사실 법치주의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자칫하면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원인이 돼 버린다. 이것이 판타지 속 법치주의의 한계다.


이미지 출처 : 프리픽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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