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철학이 있다'라는 말을 쓰곤 한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이유라면...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철학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단순히 그 순간 읽고 넘어가고 잊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주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철학이 있다'라는 건, 어쩌면 단순히 '있어빌리티'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작자로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삐딱한 시각보다는 좀 더 생산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창작자로서의 퍼스널 브랜딩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철학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창작물에 철학을 담는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정리해두려고 한다.
'철학이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는 철학이란, 그리 재미있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사전적으로 보자면 인생, 존재, 지식, 가치 등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의미하는 말이다.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이걸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고루하고 따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다만, 모든 철학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최근 철학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철학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기 애매할 만큼 넓은 영역의 많은 것들을 포괄한다는 것. 익히 생각하는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생을 바쳐가며 주장했던 이론은 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자면, 철학이란 '정답을 알 수 없는 모든 질문'과 그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 동어반복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놓는 것조차 철학이라는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철학은 그저 '생각할 거리'일 수도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그렇지만 딱히 이렇다 할 답을 찾지는 못했던 의문. 아니면 스스로 고민해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 내놓은 답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답안. 그 모든 게 철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있는' 이야기 속의 철학이란, 어쩌면 이야기의 흐름과는 크게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생각할 거리'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삶이 유한한 이유'에 대한 답은 이야기의 주제 의식일 수는 있지만 세부적인 이야기 흐름에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에는 어려운 것, 누군가에게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젓거나 팽개쳐버리는 것, 누군가에게는 흥미진진한 것, 또 누군가에게는 퍼즐을 맞춰가듯 심오한 재미를 주는 것. '철학이 있다'라는 말이 가진 여러 가지 얼굴이 아닐까.
창작에서의 철학
자,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자.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철학이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 해석한 바를 담아낼 수밖에 없겠다. 애당초 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뚜렷한 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개념이니까.
이야기에 철학이 있다는 것은, 그 이야기 속에 생각할 거리가 담겨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를테면 깊이 있는 사상이나 이념, 세계관, 가치관 등이다. 단순한 줄거리나 사건 전개를 넘어, 인물의 행동이나 선택, 또는 이야기의 결말에 어떤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간단하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판타지에서 흔히 쓰는 '마나'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이미 가상의 개념이므로 사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놓고 가져다 써도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나가 어떤 원리로 존재하는지, 어떤 이유로 마나를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나름대로 설정할 수 있다.
이것이 너무 가벼운 예시 같다면, 좀 더 묵직한 주제를 제시해보자. 판타지에는 종종 '영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영혼이 생명체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명이 끊어진 뒤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 등은 작가가 설정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설정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포함되는 범주가 넓은 만큼, 다룰 수 있는 주제도 무궁무진하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지 등도 좋다. 도덕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딜레마라든가, 계급제/신분제 사회에 따라다니는 불평등 같은 것도 이야기 속에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이 있는 이야기들은 대개 하나의 메시지만을 담지는 않는다. 인물의 입을 빌려 다양한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하고, 서로 반대되는 신념을 대립시키기도 한다. 그릇된 가치관을 담은 악역을 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철학적 메시지가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는다. 그중에는 '핵심'이 되는 더 중요한 철학이 존재한다. 매우 단순한 하나의 단어나 문장일 수도, 혹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한 작가 본인의 주관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이야기에 녹여내고자 한 철학적 핵심이 반드시 단 하나라는 보장은 없다. 작가 본인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포인트는 하나일 수도, 혹은 감상하고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철학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철학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이 있는 이야기'가 요즘의 트렌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주요 플랫폼에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보통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많다. '회.빙.환'이 대표적인 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힐링 또는 개그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상위권에서 자주 보인다.
물론, 묵직한 스토리와 철학적 메시지를 갖춘 작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점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세상이 워낙 복잡하고 살기 힘든 탓도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단한데, 이야기를 즐기러 와서까지 복잡하고 머리 아픈 질문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편인 나도 때때로 그런 생각에 싫증날 때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죽할까.
한 마디로, 지금 시대는 철학이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즐기고 지나갈 이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있어 철학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는 이야기는 따분하고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 피해 뇌를 쉬게 하려고 온 휴식처에서 다시 뇌를 극한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철학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지금은 분명한 마이너다. 날이 갈수록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앞으로도 철학이 있는 스토리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비관론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스토리 시장'을 지탱해줄 대들보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이야기일 거라고 믿으니까. 딱히 근거는 없다. 창작자로서 내 시간을, 그 믿음에 베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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