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유는 '종족'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빠져들게 된 것도, 언제부턴가 '양산형'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편식을 하게 된 것도, 독창적인 종족이 등장하는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된 것도.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누가 뭐래도 '인물'이다. 초월적 능력을 가진 인외 존재라 하더라도 결국 인물, 즉 '캐릭터'의 범주에 들어간다. 결국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주체는 모두 인물이다.
모든 인물은 하나 이상의 '소속'을 가진다. 그것은 어떤 조직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으며 그 외의 다른 어떤 형태일 수도 있다. 그리고 판타지 세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형태의 소속이라 하면 '종족'이 아닐까 한다.
종족은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고 그 세계를 탐험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종족을 잘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어디에서나 뻔하게 등장하는 종족 대신, 정말 내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 세계에 어울리는 종족들. 그런 종족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역사 - 태초에 그들이 있었다?
하나의 종족을 만들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라 하면 뭐니뭐니 해도 '역사(history)'일 것이다. 참 웅장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판타지 세계에는 높은 확률로 '창조주'가 존재한다. 창조주의 존재 자체를 거론할 필요가 없는 작품은 있겠지만, 창조주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은 아직까지 접해본 적이 없다. (물론 어딘가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창조주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마련하기로 하고, 일단은 그 창조주가 어떤 종족을 탄생시켰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들의 처음이 어땠는지,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등 많은 것이 그 안에 포함된다.
쉽게 예를 들어서, 판타지의 단골 종족인 '엘프(elf)'를 떠올려보자. 엘프 하면 일반적으로 귀가 길고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린다. 자연을 사랑하고, 활을 잘 다루며,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물론 모 작품에서 고기 먹는 근육질(?) 엘프도 보긴 했다.)
어떤 이미지인지는 상관 없다. 내 작품에서만큼은 내가 정한대로 되는 거니까.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태생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렇게 된 것인지 등 모든 '뒷 이야기'가 역사라는 이름 안에 담긴다.
종족의 역사가 작품 안에 직접 그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있더라도 특정 인물의 입을 빌려 지극히 일부만 나오거나, 매우 대략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족의 역사는 분량이 다소 짧고 디테일이 부족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그 종족이 공유하는 가치관, 특성, 행동양식 등이 모두 역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문화 -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문화라는 단어는 참 뭐라 정의하기가 힘들다. 무척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그만큼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종족의 문화라고 하면 대략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온다. 이를테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그들이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 그들이 믿는 종교, 그리고 대대로 이어오는 전통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 둘씩 모여 그 종족의 독특한 '정체성(identity)'을 만든다. 어느 개인으로 치자면 '개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들을 활용해 이야기를 예측불가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종족의 문화는 때때로 이야기 안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그 나라나 지역의 규칙이나 풍습을 몰라 낭패를 겪기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너무 뻔한 문화 요소는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한다. 누가 봐도 뻔히 갈등이 일어날 것 같은 요소를 미리 보여주면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겠나. 그런 것들은 복선으로 숨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 요소도 디테일하게 설정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종족들은 각자의 모티브가 된 무언가가 있다. 오래 전 살았던 어느 민족이라든가, 특정 지역의 전통문화 같은 것들 말이다. 딱 떠오르는 거라면 <워크래프트> 세계관의 트롤 종족 같은?
언젠가는 한 번쯤 이런 종족들의 문화, 그리고 배경이 된 모티브를 알아보며 글을 쓰고 싶다.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지만,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외교 - 누가누가 잘 지내나
어쩌다 보니 우리는 지구에 단 하나의 지능종으로 살고 있다. 음... 표현이 좀 이상한가? 아무튼 지배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건 맞으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선 다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매우 약한 종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다른 종족들이 등장한다.
인간끼리도 서로 국가를 나누고 치고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떤 종족들은 부족 단위로 나뉘기도 하고, 혹은 묘하게 생김새가 조금씩 다른 걸로 명칭을 달리하며 서로 대립하거나 협력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교가 등장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교류가 이어지듯, 종족과 종족 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족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 일 수밖에 없고, 어떤 종족은 비슷한 분야에서 계속 경쟁을 벌이며 이야깃거리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종족은 역사적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애증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그렇듯, 그리고 집단과 집단의 관계가 그렇듯, 종족과 종족의 관계도 본질은 똑같을 것이다. 그런 다양한 관계 역시 결국은 작가의 몫이다. 종족과 종족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이야기는 한층 더 디테일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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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이미지 출처 : 프리픽(freepik)
돌고돌아 결국은 디테일
돌고돌아 결국은 디테일이다. 최근 읽었던 판타지 작법서 몇 권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지만, 실제 이야기를 쓰면서는 독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을 뒷면에 설정들이 무척 많다.
좀 잘나간다 싶은 작품들이 심심찮게 '설정집'을 내놓는 건...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울 정도로 디테일한 이야기 거리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디테일한 세계를 만들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보니 블로그에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던가.
지금은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모아 나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는데 지침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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