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오늘 계획했던 글감은 '현대 판타지의 진부한 요소'였다. 하지만 어제 썼던 고전 판타지 편의 절반 정도 분량을 쓰다가 접어두었다. 자꾸 쓰다보니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을 멈추고 생각해봤다. 근 20년 가까이 글을 썼지만,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다. 그러니 글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주제'일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현대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를 내가 썩 잘 아는 편이 아니다. '진부함'이라는 키워드로 엮기에는, 내가 읽은 현대 판타지 작품이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러니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몹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알맹이가 없으니 글이 자꾸 제자리를 맴돈다.
그래서 덮었다. 나중에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서 완성하든지, 아니면 아예 접고 다른 식으로 쓰든지 하자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무엇을 쓸까? 장르와 상관없이 내가 '진부하다'라고 느끼는 요소들에 대해 써볼까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제 썼던 글 역시 본질은 '고전 판타지'라는 장르가 아니었다. 진작에 작품에 등장하는 세부적 요소들 중에서 찾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교통정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일단, 써본다.
내가 느끼는 진부함 1. 소드 마스터
세부 장르를 불문하고 판타지라면 매우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마스터'는 거의 필수고, 그 위로 그랜드마스터, 아래로 익스퍼트 등이 자매품(?)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이해는 된다. 강함의 척도를 보여줄 무언가는 필요하다. 만약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는 사이다식 전개를 구상하고 있다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주인공이 이길지 질지 고전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소드 마스터라는 개념 자체는 무척 오래 전에 등장했다. 하지만 '강함의 척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스템에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일단 소드 마스터라 하면 최소한 꽤 강한 능력자로 꼽히고, 어딜 가든 희소성이 있는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소드 마스터라는 개념만 등장할 뿐, 구체적인 설정이 빠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익숙한 개념인 건 맞지만, 어느 정도 위치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공식처럼 정해진 건 아니다. 검을 매개로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설정은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사실 그조차도 엄밀하게 정해진 공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세계관에서 소드 마스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은연 중에 드러내주는 것이 맞다. 그게 빠진 채 '소드 마스터니까 이 정도는 해결 가능'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이것이 진부함을 만드는 포인트가 아닐까.
내가 느끼는 진부함 2. 서클 시스템
마법은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다. 마법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보통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진부함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마법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고르고 골라 한 가지 포인트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서클 시스템'이다.
어찌 보면 소드 마스터와 같은 맥락이다. '서클'이라는 개념은 판타지에서 단골처럼 사용되는 소재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은연 중에 마법사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곤 한다. 보통은 7서클 이상이면 대마법사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서클은 어차피 가상의 개념이다. 서클이 높으면 강해진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왜 강함의 상징인지는 모른다. 소드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서클 역시 공식은 아니다. 작가가 설정한 법칙 안에서 서클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이야기에 일관성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설정 없이 서클이라는 개념만 계속 사용하다보면, 이야기는 단조로워진다. 예를 들자면, 5서클은 6서클을 죽어도 이길 수 없고, 6서클 마법사 여럿이 모여도 대마법사에 해당하는 7서클에게는 비빌 수 없다는 식의 얼렁뚱땅한 설정이 이어지기 쉽다.
서클과 서클 사이에 규칙을 정하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5서클이더라도 마나 운용 능력 및 아이디어 응용이 탁월하다면 한 서클 차이 정도는 비벼볼 수 있어야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능할 거라는 입장이다.
아주 오래됐지만, '마나의 재배열 횟수'라는 개념으로 서클의 차이를 나름대로 설명하려 했던 작품이 생각난다. 나는 아직도 그 작가가 어떤 식으로 서클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는지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이 인상 깊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그 정도의 노력도 없이 그냥 서클이라는 개념을 만능 키처럼 사용하는 작품들을 보면 진부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내가 느끼는 진부함 3. 귀족 작위
제일 이해하고 싶지 않고, 사용하고 싶지도 않은 요소로 꼽는다. 흔히 '오등작'이라고 부르는 귀족의 작위 시스템이다. 이 체계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제대로 알고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아마 잘 모르면서 그럴 듯해보이니까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알다시피 오등작은 역사에서 실제 사용됐던 체계다. 제국이니 왕국이니 공국이니 하는 국가 체계가 여기저기 등장하는 판타지 특성상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이어지는 귀족들의 작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소드 마스터나 서클과 달리, 이들은 완전한 가상의 개념이 아니다. 물론 실제 개념이 소설에 그대로 반영돼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설명은 있어야 한다.
현실의 체계를 가져다 쓰려면 그에 관한 고증이 뒷받침돼야 하고, 단순히 명칭만 가져다 쓰는 거라면 작가 본인이 생각한 '체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은 채 그냥 명칭만 가져다가 아무렇게나 쓰는 경우가 너무 많다.
깊게 들어가면 복잡해지니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제국이나 왕국에서 거대한 권력을 쥔 인물이자, 종종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들과 갈등하는 역할로는 '공작'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이 황제나 왕에게 맞먹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공작이 그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냥 공작이기 때문에 권력이 센 것이 아니라, 강대한 세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가 강해졌다는 쪽이 합리적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보자면, 애당초 공작은 자신의 영지(공국)에서 왕처럼 정무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제국이나 왕국의 산하에 있더라도, 그만큼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곧 권력의 상징이니까.
쉽게 말해 황궁이나 왕궁에 와서 세세한 권력 다툼이나 벌이고 있을 여유가 없는 게 정상이라는 뜻이다. 권력 싸움을 하려면 자신의 영지로 사람들을 불러서 만나고 의논할 일이지, 황궁이나 왕궁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협잡질을 할 만큼 한가한 위치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디테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설정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 있어서, 오등작이라는 체계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진부하게 보일 거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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